이태호의 답사스케치4 : 여주 신륵사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첫번째
08/0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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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16일 35년 만에 여주 신륵사를 탐방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가 준비한 2019년 기획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7.23~9.22) 전시의 한 코너로, ‘옛 화가들이 실경을 어떻게 그렸나’하는 화가의 시선에 관한 영상물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획전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한국의 비경이자 명소 30여 곳을 그린 작품 360여 점으로 꾸며졌다. 촬영장소로 겸재 정선이나 진재 김윤겸의 한양 진경산수보다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등장한 강변 신륵사(神勒寺) 그림의 현장을 선택한 것이다. 영상 코너 제목은 “배에서 바라본 신륵사 – 다시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현장”이다. 신륵사 그림을 선정한 이유는 정수영이 특별히 신륵사 전경과 암반벼랑인 신륵사 동대(東臺)를 여러 차례 사생했고, 그림을 그린 위치와 시점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화가가 보았던 시점과 그 정경을 그려낸 시점의 차이는 사진 촬영과 직접 스케치를 통해 확인된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신륵사 전경과 동대 그림

조선 후기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백리척(百里尺)으로 조선지도를 그린 실학자 농포자 정상기(農圃子 鄭尙驥, 1678-1752)의 증손자로, 할아버지 정항령(鄭恒齡, 1710~1770)과 함께 지도제작에도 참여한 문인화가이다. 정수영은 두 권의 기행서화첩을 남겼다. 한 권은 1797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1799년에 그린 《해산첩(海山帖)》이고, 또 한 권은 1797년 여름 남한강과 임진강을 선유(船遊)하고 제작한 《한·임강명승도권》이다. 《해산첩》은 한면한면이 동일 크기의 화첩인 데 비해, 《한·임강명승도권》은 두 강을 여행하며 만난 그때그때 실경을 넓게 혹은 좁게 사생한 횡축(橫軸)의 긴 두루마리이다.
26개의 화면을 담은 16m가량의 《한·임강명승도권》은 조선 시대 회화사에서 새롭고 독특한 사생화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이 두루마리 그림을 포함해 정수영에 대하여 35년 전에 논문으로 낸 적이 있었고, 그때 처음 여주 신륵사를 답사했다. (이태호, 「지우재 정수영의 회화」-그의 在世年代와 作品槪觀, 󰡔미술자료󰡕 34, 국립중앙박물관, 1984.)
논문 발표 때는 정수영의 회화세계를 개괄하느라 신륵사 외에 모든 그림의 현장을 확인하지 않았다. 근래 겸재 정선의 1742년 작 《연강임술첩》(개인소장)의 삭녕 우화정(羽化亭)과 연천의 웅연(熊淵) 나루 그림 현장을 찾는 과정에서, 사암서원(思庵書院)이나 금수정(金水亭) 등 정수영이 그린 포천지역 임진강 현장을 새로이 답사하였다. 여기서 나는 연천 미수나루의 강변 바위벼랑이 부엉이바위라 불리고 모양새가 《한·임강명승도권》의 <휴류암>과 바위 모습이 흡사해 <휴류암>의 현장으로 선뜻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 2011. ;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소동파 적벽부의 조선적 형상화, 『동양미술사학』 2, 동양미술사학회, 2013.) 이런저런 오류도 수정할 겸 <신륵사>로 시작한 김에 앞으로 몇 번에 걸쳐 《한·임강명승도권》에 그려진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가 보겠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신륵사> 그림에는 정수영이 그림 제목을 써넣었듯이 ‘신륵사(神勒寺)’ 전경과, 그 오른쪽으로 절 모퉁 ‘사우(寺隅)’에 해당하는 신륵사 동대(東臺)가 등장한다.

1. 정수영, 한임강명승도권의 신륵사와 다시 그린 동대 부분, 1797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리고 강관(姜亻寬)이 “옛사람의 시에 ‘평생 잊지 못할 최고 승경, 신륵사 앞 호수이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古人詩曰, ‘平生最難忘 神勒寺前湖’ 其此之謂乎)”라고 그림 아래에 덧붙였다. 강관은 표암 강세황의 아들로 정수영과 교우했으며, 이 도권의 장면마다 제발문 글을 쓴 문인이다.
<신륵사> 전경도 오른편으로 동대 벼랑만을 비스듬히 별도로 또 그렸다. 이 <신륵동대(神勒東臺)>에는 “절 모퉁이 모습이 앞면과 닮지 않아 고쳐 다시 그린다(寺隅景似不如前面 改更寫之)”라고 써넣었다. 정수영은 신륵사 그림에 이어 여강과 섬강이 만나는 원주 <흥원창(興元倉)>, 광주 남종의 <소청탄(小淸灘)>과 정수영과 철친인 여춘영(呂春永)의 ‘헌적별업(軒適別業)’이 있는 <수청탄(水淸灘)>을 연이어 그렸고, 여주의 <휴류암(鵂鶹巖)>으로 돌아온 뒤 <신륵동대 동적석(神勒東臺東積石)>과 <신륵동대(神勒東臺)>를 다시 화폭에 담았다. <고산서원(孤山書院)> <여주읍내(驪州邑內)>로 시작한 여강 사생을 <여주읍치(驪州邑治)>에서 마무리했다. 신륵사를 제외한 여주의 이들 실경도에 대하여는 다음번에 자세히 다루겠다.

 

시대 말의 지성이자 성직자 이색과 나옹의 신륵사

촬영을 떠나기 전에 정수영을 비롯한 조선 후기 화기들의 사생 방식에 따라 준비물을 챙겼다. 우선 동산방화랑에 주문해 닥종이로 50×300센티미터짜리 옆으로 긴 두루마리 횡권(橫卷)을 제작했다. 또 야외용으로 썼을 법한 작은 벼루와 연적, 먹물 담는 묵호와 먹, 붓과 유탄을 준비했고, 이동용 먹통을 갤러리 문우와 민예사랑에서 구했다. 누런 신주로 만든 동제(銅製) 먹통은 수묵 서화가 발달한 한·중·일이 비슷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옛 선비들의 간소한 여정과 기록 의지를 읽게 해준다. 조선 후기 것이 한 뼘 정도 크기로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미를 보여준다. 먹물 솜을 넣는 육면체 공간이 긴 손잡이와 어우러져 그렇다. 손잡이 부분에는 가느다란 붓이나 유탄, 혹은 젓가락을 넣어두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해, 야외용으로 쓰임새를 높인 점도 여간 재치 넘친다.

첫날 5윌 15일에는 신륵사 경내를 돌아보고, 이튼날 16일에는 정수영이 했던 대로 신륵사 정경 그리기 과정을 촬영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전시실의 영상을 맡은 문동수 학예관과 이재호 학예사, 그리고 이번 학기 조선시대회화사를 수강하는 대학원생 강인영과 백은선이 함께했다. 박물관의 두 사람은 한국회화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연구자이고, 대학원생 두 사람은 마침 학부에서 한국화전공자여서 안성맞춤이었다.
15일 오후 5시쯤 여주에 도착해 먼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촬영팀이 잡은 호텔(SunValley Hotel)이 신륵사 남쪽 강언덕에 위치해, 11층 방 베란다에서 신륵사 경내와 동대 암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베란다는 조선 후기 진경 화가들의 부감 시점을 확인시켜주는 자리였다. 그리고 여강(驪江)의 동서로 펼쳐진 경치를 조망하니, “아! 이 위치가 절을 세우기에 최고다”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신륵사는 낮낮한 산자락 강변의 유난히 아름다운 벼랑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2. 신륵사 전경과 황포돗배 나루, 2019년 5월, 사진 이태호
늦은 오후 햇살이 좋아 사진을 찍고 그 전경을 가볍게 스케치한 뒤, 해거름 강을 건너 신륵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신륵사(神勒寺)는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황의 꼬리’ 봉미산(鳳尾山) 기슭 강가에 위치한다. 산사(山寺)가 발달한 우리나라의 사원 구조를 따르면서도 강변에 조성한 독특한 가람으로 꼽힌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의 창건설이 전하는 천년고찰이다. 현재 동대 암반에 세워진 3층석탑(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3호)이 신라식 석탑을 계승한 고려 형식으로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적이다. 또 유적으로는 고려 말 꽃무늬 벽돌이 포함된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고려 말기의 대표적 승탑 양식인 나옹의 승탑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8호), 승탑 앞 비천(飛天)과 용이 부조된 석등(보물 제231호),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제존자석비(普濟尊者石碑, 보물 제229호), 이색의 부친 이곡(李穀)이 제작에 관여한 대장경의 보관건물 중층 대장각을 세웠다는 기념물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세종의 영릉 원찰(願刹)로 지정되며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 초기 대리석재의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했던 호국 사찰로 꼽힌다. 경내에 보전된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을 모신 극락보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 구룡루(九龍樓) 등은 현종 이후 조선 후기 복원된 절집이다.
조사당에 삼화상진영(三和尙眞影,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67호)으로 모신 지공, 나옹, 무학은 고려 말에 큰 법맥을 형성했던 거승들로 꼽힌다. 정치적으로 지공선사의 제자인 나옹은 태조의 조선건국을 도운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신륵사의 명성은 나옹의 입적과 다비 장소, 그리고 나옹의 신통력에서 비롯되었다. 미륵(彌勒)의 의미로 여겨지는 ‘신륵’은 고려 말 나옹(懶翁)과 용마(龍馬)와 관련한 전설에서 찾기도 한다. 나옹선사의 다비를 치룬 곳이라는 동대 벼랑에는 ‘東臺, 李敦夏’라는 해서체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돈하(1824~?)가 1874년(고종 11) 여주목사에 부임해 쓴 것이다. 현재 나옹의 아호를 따른 강월헌(江月軒)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6모지붕의 정자인 데다, 정수영의 그림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20세기 들어 세운 듯하다.
동대 암반의 벼랑에 서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는 나옹의 선시(禪詩)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 보물 제229호 나옹 혜근(惠勤)의 승탑 비문을 쓴, 종교와 문학적 도반 격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곳이어서 더불어 빛을 발했다. 이색은 조선의 새 정권에 참여하지 않으며, “백설이 자자 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 온 매화는 어느 곳에 픠엿는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흰 눈이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구나,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날이 저물어 가는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라며 고려 말 혼돈의 시대상을 읊었다. 이러한 회구가(懷舊歌)를 남기면서도, 이색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북인 계열이던 지우재 정수영이 친구들과 신륵사를 찾고 동대 벼랑을 반복해 그린 것도 바로 고려 말의 지성 목은 이색과 성직자 나옹 혜근을 기리기 위함 같다.

 

배를 타고 정수영의 시선을 만나다

이튿날 16일 호텔 방에서 새벽 눈을 뜨자마자 일출을 기대했으나 구름 잔뜩 껴 흐렸다. 오전에는 황포돗배를 타고 여주교 근처 여주 관아의 문을 이전 복원한 영월루(迎月樓) 아래 마암(馬巖)부터 신륵사 동쪽 강변까지 돌아보았다. 삼백여 년 전 정수영의 사생 포인트를 찾고, 신륵사 그림과 실경을 비교해가며 배에서 스케치하였다. 이때는 나에게 익숙한 대로 유럽산 면지에 수묵 붓펜을 사용했다. 선상에서는 정수영의 시점을 찾기 위해 고려의 삼층석탑과 다층전탑이 서 있는 바위벼랑 동대만을 여러 점 그렸다. 강에서 보이는 대로 잡으면서도 정수영의 신륵사나 신륵동대 그림처럼 동시에 두 탑과 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신륵사 전경과 동대의 실제 풍경은 정수영의 그림과 크게 달랐다. 정수영의 <신륵사>도 그림만을 보면, 배를 타고 선유하며 강에서 포착한 낮은 시점의 구도로 보인다. 그래서 정수영이 수평시점으로 그렸을 거라 착각하기 쉽게 한다. 우선 선상에서는 신륵사처럼 경내불전들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절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잡은 부감시점(俯瞰視點)을 적용한 셈이다. 더욱이 전탑과 석탑 두기의 탑과 비석이 세워진 동대는 수정을 거듭해 표현하였다. 정수영은 보이는 대로 수평시점을 유지하기보다 잘 아는 유적이나 건물들을 담기 위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전통적인 부감시점을 적용했던 셈이다.
선상에서 정수영 그림 <신륵동대(神勒東臺)>나 <신륵동대 동적석(神勒東臺東積石)>의 바위벼랑을 따라 그리며 내가 정수영의 미숙함과 오류를 지적하자, 황포돗배의 선장께서 거들었다. 정수영의 <신륵동대 동적석> 그림이 어려서부터 늘 보며 눈에 익은 모습과 비슷한 점도 있다고 한다. 정수영의 적석 그림에서 수평으로 겹 쌓인 암반 가운데 솟은 바위를 가리키며, 1972년 여름 대홍수 때 사라졌다는 것이다. 황포돗배 선장의 대홍수 얘기를 들으니, 신륵사 강 건너 여주공원의 영월루 북벽 아래 마암을 다시 떠올렸다. 말바위 마암이 《한·임강명승도권》 가운데 <휴류암> 그림의 실경 현장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번 정수영의 여주 실경도들과 엮어 소개하겠다.

점심 이후 화가의 시선, 곧 정수영이 신륵사 도를 그렸던 시점과 걸맞은 위치에서 유탄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수묵담채화 과정을 촬영하기로 했다. 이재호 학예사가 미리 답사해서 회화사전공자답게, 눈썰매 있게 정수영의 신륵사도 가스 잠근 사한 장소를 물색해놓았다. 신륵사 남쪽 강 언덕 포구였다. 선상에서 확인했듯이, 신륵사 침상 당 항 하고 리를 둔 정수영의 부감 시 위치로 적합한 곳이었다.
정수영의 <신륵사도> 시점에 근사치로 유탄 밑그림을 그려보니 상당하게 부감시가 응용되었음을 재확인하였다. 정수영이 사찰경내 여러 건물을 수평으로 배치했지만, 앞 건물들 지붕 위로 주 법당인 극락보전을 상당히 솟게 그렸다. 건물들의 입면도가 제각각이고, 중층인데 단층으로 그려진 구룡루는 맨 오른쪽에 보인다. 절의 오른편 바위 언덕 두 탑과 비가 서 있는 동대는 사선으로 그려, 사원보다 올려놓았다. 수평시점으로 본 것처럼 배치해 어색하다. 그래서인지 정수영은 동대만을 신륵사도 왼편에 또 그렸다. “절 모퉁이 모습이 앞면과 닮지 않아 고쳐서 다시 그린다(寺隅景似不如前面 改更寫之)”라고 잘못돼 수정해서 다시 그린다고 써넣었다. 여기서는 선상에서 시점을 동쪽으로 옮겨 보이지 않는 탑비(塔碑)를 생략하고 두 탑만 그려 넣었으나 실경현장과 쏙 빼닮지 않은 것은 여전하다.
정수영은 원주 쪽 흥원창과 광주 쪽 수청탄을 다녀오고 <휴류암>을 그린 뒤 <신륵동대(神勒東臺)>나 <신륵동대 동적석(神勒東臺東積石)>을 그려 동대 정경이나 동대적석을 클로즈업해 또다시 그려보기도 했다. 세 번째 그린 <신륵동대>에는 비석이 3기로 2기가 추가되어 있고, 3층석탑은 5층석탑으로 잘못 그려져 있다. 배를 타고 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돌아본 신륵사와 동대를 기억된 정보로 표현한 듯하다
이처럼 정수영의 <신륵사>는 훈련되지 않은 다시점(多視點)을 그대로 드러낸 그림이다. 근경 강변의 수목 위로 중경에 수목을 배치했고, 사원을 감싼 봉미산 능선마저 담았다. 강기슭 언덕길 모습은 새의 눈으로 본시 선처럼 아예 부감시점으로 잡은 것이다. 이처럼 경내건물과 탑비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시점은 내가 묵었던 호텔 11층 전망과도 유사할 정도였다. 5~6층 정도에서 보이는 풍경이 가장 적절하다 싶었다.
겸재 정선을 비롯해 조선 후기화가들이 그랬듯이, 현장 사생을 즐겼던 정수영도 대부분 부감시점을 썼음을 확인한 것이다. 어찌 보면 부감시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이 사생현장의 시점을 적용해, 정수영식 다시점을 구축한 셈이다. 다만 보이는 대로 대상풍경을 정확히 그려낼 정수영의 기량 부족이 아쉽긴 하다. 정확한 묘사는 단원 김홍도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난생처음 조선 닥종이에 수묵담채화를 그려본 셈이다. 밑그림 유탄사용도 마찬가지였다. 근래 다시 붓을 잡으며 습관처럼 밑그림 없이 붓펜 소묘나 먹그림, 수채화를 자유로이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대로 표현되지 않고 쉽지 않았다. 역시 재료에 대한 이해와 숙련이 필요하다 싶었다. 결국, 면지에 수채화 하듯이 수묵과 담채를 조절하며 어색한 대로 마무리해 보았다.

3. 이태호, 신륵사여름맞이, 종이에 수묵담채, 49.5×153.5cm, 2019. 5.
그런데 한 달쯤 뒤에 이재호 학예사가 연락했다. 편집하는 과정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붓펜으로 그리는 모습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7월 2일 이전 촬영 팀과 배를 타고 붓펜으로 스케치했던 <신륵사 동대 적석도>를 유탄으로 밑그림 그리기 과정을 다시 재연했다. 또 강 건너편 나루에서 <신륵사전경도>를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유탄 사생 위에 수묵으로만 완성해보았다. 유탄으로 비교적 상세히 사생해 보니 종이 부푸러기가 일어 전통 닥종이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동산방에서 제작한 두루마리를 세 점으로 채우게 되었다.
7월 촬영에는 화봉옥션 큐레이터를 했던 양선미 씨가 참여해 작업과정을 촬영해주었다. 또 마침 이번 전시를 도운다는,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으로 석사논문을 쓴 한상윤 씨가 이재호 학예사를 거들었다. 멋진 영상물을 제작한 연출감독 피디는 김성화 선생이고, 촬영감독은 유용덕 선생이었다. 두 감독은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국내 최고의 베테랑 팀다웠다. 제작에 심혈을 다한 두 감독의 열정만큼이나, 3분짜리 영상물은 산수화 전시장의 꽃 같다.

전시회 공개 다음 날인 7월 24일 나는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금강산수-옛 그림과 함께 아름다운 금강산 돌아보기”를 강연했다.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 화가들의 금강산 그림의 예술성과 변모, 그리고 금강산의 절경들을 보여주었다. 그림과 실경 현장을 비교하기 위해 그동안 묵혀 놓았던 사진들을 찾고 보완해 양껏 편집하느라 강연시간을 10분이나 초과하였다. 금강산을 5번 다녀오면서 직접 찍은 것들이고, 올해 2월 해금강 일출 광경은 처음 선보였다. 이때 스케치는 내년 초쯤에 소개할 예정이다.
실경산수화가 그랬는지, 금강산이 불러들였는지 대강당에는 바닥에 앉고 서고 청중들로 넘쳤다. 금강산과 금강산 그림 걸작에 매료된 일천 사백여 명 청중의 눈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료집 나눠주며 숫자를 센 직원이 슬쩍 박물관 강연역사에 새 기록이라 한다. 내 40년 미술사 강의 수강생 숫자로도 신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