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 도화서(圖畫署) 혁파(革罷)를 주장하다?
07/25/2019
/ salon
석지 채용신, , Color on silk, 33☓46.2cm, 1920, signed and sealed on the reverse, 고종황제 49세(1901년)때 제작한 어진을 모사한 그림
황철(黃鐵, 1864~1930) 선생은 우리나라 사진도입의 선구자 중 한분입니다. 집안이 원래 광산(鑛山)을 경영하고 있었고, 1882년 근대화를 추진 중이던 조선정부의 권유로 광산기계를 시찰하고 수입하기 위해 중국의 텐진(天津)을 방문했습니다. 기계 구입을 마친 황철은 근대 문물을 돌아보기 위해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까지 방문했고, 이곳에서 머물며 사진술을 익혔습니다. 상하이를 떠나 귀국하면서 독일제 카메라와 재료 등을 구입해왔고, 1883년 지금의 종로구 삼청동 초입에 있던 대안동(大安洞) 사저의 서책 사랑을 개조하여 사진 촬영시설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황철 선생의 사진술 습득과 사진관 설립 등 사진에 관한 역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선생의 아들인 황치문(黃致文)이 1954년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해서 남긴 전기(傳記)를 통해서입니다. 황철 선생의 생전 일기와 일본 망명 시절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책으로, 선생의 호(號) ‘어문(魚文)’을 딴 『어문공전기(魚文公傳記)』입니다. 이 책은 원래 한문(漢文)이 대부분인 기록인데 선생의 손자인 황대용(黃大鎔) 씨가 국문으로 번역했습니다. 1998년 현재 관장으로 있는 윤범모 교수의 노력으로 에서 출간했습니다. 황철 선생의 가계(家系)부터 출생과 관직 그리고 사회 활동 등이 시대 별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습니다.

“1883년 계미(癸未) 고종(高宗) 20년 20세
대안동(大安洞) 사저(私邸)의 서책사랑(書冊舍廊)을 개조하여 사진 촬영소를 설치하시다…..(중략)….이때에 공이 상소하여 ‘도화서(圖畫署)를 혁파(革罷)하고 사진(寫眞)으로 대치(代置)하소서’ 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잠시 뒷날을 기다리라 하시다.”

이 상소의 요지는 도화서의 관리들에게 사진을 배우게 해서 손으로 그리는 초상화나 기록화 등을 카메라를 사용해 이를 대신하도록, 사진과 대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전기의 내용에서 보듯이 바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 500년 내내 이어온 정부의 직제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진(御眞)과 의궤(儀軌) 등 국가의 중요한 그림을 전담했던 조직을 없애고 사진가들로 대체하라는 상소는, 만약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이자 도전이었습니다. 도화서에 소속되어 집안 대대로 일해 온 화원(畫員)들의 밥줄을 끊어 버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도화서(圖畵署)라는 직제는 조선 건국 시기인 태조(太祖) 1년 즉 1392년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예조판서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1명과 별제(別提-종 6품) 2명, 잡직(雜職)으로 화원(畫員) 20명 정도와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3명을 둔 중요한 정부 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왕실과 사대부 등의 요청을 받아 작업을 하는 관청이었지만, 국가가 제도적으로 화가를 양성하고 보호하는 곳이었고 조선의 화풍을 형성하고 이어나가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 미술의 거장으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道)’를 그린 안견(安堅),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등도 바로 도화서 출신의 화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진 도입의 선구자 중 한분으로 1883년 일본인 사진사를 초빙해서 최초의 사진관을 개업한 김용원(金鏞元, 1842~1892) 선생 또한 화원 출신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1880년대 초 조선에 사진이 도입된 후로 점차 도화서의 규모와 역할이 축소되었고, 결국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들이 도화서 화원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94년 조선정부는 예조(禮曹) 소속으로 있던 도화서를 훨씬 규모가 작은 규장각(奎章閣)에 통합했고, 1895년에는 연행사(燕行使)나 통신사(通信使) 등 외지에 파견하는 사절단을 따라가 기록하는 수행화원의 숫자를 대폭 줄이거나 없앴습니다. 또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대부터는 도화서에서 어진을 제작할 때는 사진을 밑그림으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화원들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사진이 그림을 대신하게 되면서 의궤 같은 기록화를 그리거나 어진의 밑그림을 맡았던 전통 화원들을 양성할 필요가 없어졌고, 도화서 또한 유명무실해진 것입니다. 한국미술사 연구자들은 대개 1903년 정도 도화서가 혁파되었다고 전합니다.

고종 황제가 사진 찍는 일을 좋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본인 사진사, 지운영과 같은 조선인 사진사, 서양에서 온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 같은 사람 등 카메라를 든 누구도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고종의 어사진(御寫眞)은 다양한 형태와 복식으로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후로 정식으로 어진(御眞)을 제작하고 봉안할 때도 사진을 보고 그렸습니다. 고종과 순종을 많이 그린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나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48년~1941)의 어진도 전부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채용신의 유명한 초상화 ‘매천 황현 상(梅泉 黃玹 像)’도 해강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그대로 모사(模寫)한 그림입니다.

왼쪽은 채용신의 그림, 오른쪽은 김규진의 사진

도화서의 운명과 관계없이,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어문공전기(魚文公傳記)』에 나오는 기록의 신빙성 여부입니다. 만일 황철 선생이 실제로 도화서 혁파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면, 조선왕조실록의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어딘가에는 관련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에 관한 기록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경상남도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황철 선생은 고종을 독대할 위치에 있지 않아서 구두로 아뢰었다고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도화서 혁파’가 평소 선생의 주장이었는지, 실제 그런 상소를 올렸는지. 아니면 올리려고 시도했는지 확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