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 외전 2
07/25/2019
/ salon

지운영, <장송낙일>, 1917년, 비단에 수묵담채, 134.2 × 38.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운영 선생이 환갑을 맞아 관악산 삼막사(三幕寺)에 백련암을 짓고 은거에 들어간 때가 1912년이었습니다. 경술국치를 겪고 일단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때부터 그림에 천착해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장송낙일도(長松落日圖)>입니다. 말을 탄 채 해질 무렵 우거진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한 선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고 칩거에 들어간 자신의 운명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지운영 선생은 시인으로서도 대단한 작가셨지만 화가로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물론 당시의 지식인들 대부분은 시(시), 서(서), 화(화)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인(中人) 출신으로 중앙 정부의 고위 관직에도 올랐고, 사진술을 도입했으며 고종(高宗)의 어진(御眞)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시(詩), 서(書), 화(畵) 전반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화유산을 남긴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로 무술(武術)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육교시사의 동인으로 세상을 공부하고 인맥을 쌓은 지운영 선생은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 일행에 포함되어 일본을 다녀왔고, 고베에서 사진술을 습득하고 귀국해서 촬영국을 개설했습니다. 또 관직에 기용되어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당시 임금의 어진을 찍었을 정도이니 거의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883년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1884년에는 아문 산하의 전선사부장(典選司付掌)을 지냈습니다.

승정원일기, 1884년(고종 21년) 3월 29일자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전 주사 지운영(池運永)을 본 아문의 주사로 차하하여 전선사 부장으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셨다.” 전선사란 고종 17년인 1880년에 설치한 ‘재지(才智)와 기예(技藝)를 가진 인재등용과 각 관사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관장하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한 부서’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혁명 실패 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은 일입니다. 1886년 밀명을 수행하는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浦敵使)’로 임명되어 암살의 임무를 띠고 다시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이 해 3월 도쿄에 도착한 선생은 마루키(丸木利陽) 등과 같은 일본인 사진사들과 교류를 가졌습니다. 같은 사진사였기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그들의 일정한 도움을 받아 암살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암살 시도는 실패에 그쳤고, 요코하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인 조선에 송환되었습니다.

지운영 선생이 암살 자객으로 임명된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먼저 평소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가 많이 있어 김옥균의 용모를 잘 알고 있어 대상을 특정하기 용이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선생은 체격이 건장했고 어릴 적부터 택견을 수련해서 호신술을 비롯한 무술에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황철, 지운영 합작, <산수도>, 1932, 비단에 채색, 250.0×84.0cm,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佐野市郷土博物館) 소장

자객으로 적합한 조건입니다. 또 사진을 하는 사진사여서 카메라 같은 장비와 약품을 구하러 간다고 목적을 위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보호 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객으로서는 신분의 위장이 필요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암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선생을 약산(藥山)으로 유명한 평안도 영변(寧邊)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화가로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86년 영변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후부터였다고 전해집니다. 1889년까지 거의 3년에 가까운 유배 생활은 선생의 인생에서 큰 전환기였습니다. 당시의 조정에 대한 충성과 헌신으로 일관한 관료 생활의 결과가 결국 유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배에서 풀린 선생은 자신의 이름을 운영(運英)에서 운영(雲英)으로 바꿨고, 설봉(雪峰)으로 사용하던 호 또한 백련(白蓮)으로 바꿨습니다. 유배가 삶의 큰 전환점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후 선생은 그림을 그리며 은둔형의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때 선생을 화가로 이끈 분이 같은 사진도입의 선구자였던 황철(黃鐵, 1864~1930) 선생이었습니다. 두 분은 사진과 회화를 넘나들며 교류한 동지였습니다. 두 분의 관계는 합작 작품인 <산수도(山水圖)>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선생은 1895년, 1904년 두 차례 중국을 여행하며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갔습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지운영의 화풍에 대해, “옛 그림들로 임모(臨模)하여 기량을 길렀으며, 특히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 화풍은 대체로 중국풍이 짙은 북종 원체적(北宗, 院體的)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독창적인 화풍은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인물과 산수를 적절히 배치하는 구성력은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후적벽부도(後赤壁賦圖), 남극노인수성도(南極老人壽星圖), 동파선생입극도(東坡先生笠屐圖) 등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김영윤(金永胤)은 한국회화인명사서에서 “글씨는 해서, 행서에 능했으며, 구성궁체(九成宮體)를 많이 따랐다. 그림은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 풍의 산수, 인물을 잘하여 필치가 창고아윤(蒼古雅潤)하고 색조가 청고숙탈(淸高肅脫)하여 옛사람의 화풍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1921년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했으며, 1922년에 개최된 제1회조선미술전람회에 ‘산인탁족도’(山人濯足圖)를 출품해 입선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한국화단의 중심인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관직과 사진을 등지고 보낸 선생의 말년이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