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 지운영 외전(外傳) 1
07/25/2019
/ salon

지운영, 산림초옥도(山林草屋圖), 1880년대, 비단에 먹,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夙視永綃上, 微芒生川嶽. 急捉斧劈毫, 揮灑神有學. 孤松弄澗漪, 荒竹鳴風雹. 此境蒼而寒, 居人拙且樸. 苔紋上几席, 茅宇擁芳葯. 山深不設門, 烟景何杳邈.點綴多空幻, 恥從古家學. 若具卞和眼, 誰無荊山樸.

平安古城旅次楢林先生大雅法鑒, 朝鮮遊客池運永詩書畵,

위 글은 우리나라 사진도입의 선구자인 설봉 지운영(雪峰 池雲英, 1852~1935) 선생의 그림 산림초옥도(山林草屋圖)에 써넣은 시(詩) 전문입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의 근대서화 관련 전시를 하면서 이 작품을 걸었습니다. 다음 글은 위의 시를 박물관이 번역, 소개한 것입니다.

“흰 비단 위에 아스라이 냇물과 산악 생긴 것 일찍부터 보고는, 급히 붓을 잡아 부벽준(斧劈皴)으로 그려내니, 시원하게 휘두르니 깨달음이 있네. 외로운 소나무는 계곡 물결 희롱하고, 거친 대나무는 바람과 우박에 울리네. 이곳은 푸르고 차가우니, 여기사는 사람은 성품이 졸박하네. 바위 이끼 위에 안석 펼쳤고, 띠 집에는 향초가 둘러쌌네. 산이 깊어 문을 만들지 않았으니, 안개 낀 경치 어찌 그리 아득한가. 공환(空幻)이 여럿 점철되어, 옛날부터의 가학(家學)에 부끄럽구나. 만약 변화(卞和)의 안목을 가졌다면, 누가 형산박(荊山璞)이 없겠는가.”

“헤이안(平安) 고성에 있는 여관에서, 유림(楢林) 선생의 부탁으로 드리니 감상하길 바라오. 조선의 유객 지운영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다.”

그림 좌측 상단의 끝부분에는 “池運永印(지운영인)”과 “香秋公南(향추공남)”이라고 새긴 낙관 두 개가 찍혀있습니다. “지운영 자신의 글과 그림이며, 향추관(香秋館)에 기거하는 사람의 합장”이라는 뜻입니다. 선생이 일본 교토(京都)의 향추관(香秋館)에 머무를 때 유림 선생이라고 칭한 일본인에게 그려준 글과 그림입니다. 선생은 자신의 글을 모은 책 두 권을 냈는데, 이 문집(文集)의 이름도 『香秋館集(향추관집)』 이었습니다.

지운영 선생은 한국사진 도입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사 김용원(薇史 金鏞元, 1842~1896) 선생, 황철(黃鐵, 1864~1930) 선생 등과 더불어 서울에 사진관을 개업하고 사진술을 조선에 전파했습니다. 이분들 중에서도 사진사 지운영 선생은 1884년 당시 국가의 상징인 고종의 초상사진인 어사진(御寫眞)을 촬영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시인(詩人)으로서 또는 화가(畫家)로서의 선생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강위(姜瑋, 1820~1884)의 문하에서 시문을 수학했고, 1880년경 중국에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1870년대 말부터는 역관(譯官)과 의관(醫官) 등 기술직 중인(中人)들이 지운영 선생의 시 스승이었던 강위를 맹주(盟主)로 하여 맺은 ‘육교시사(六橋詩社)’의 동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육교시사’라는 이름은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 번째 다리인 광교(廣敎) 부근에 모여 사는 시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입니다. 광교(廣敎)는 현재 수표교(水標橋)의 과거 별칭입니다. 강위를 비롯한 김경수(金景遂, 1818~?), 김석준(金奭準, 1831~1915) 등 중인 출신의 중견 지식인들이 젊은이들과 만나 시를 지으며 개화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중국 일본 등을 다녀온 동인들이 경험한 외국의 다양한 선진문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의 나이 겨우 20대 초반의 일입니다.

지운영 선생의 스승이자 ‘육교시사’의 맹주였던 강위 선생은 1873년 ‘사은겸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였던 정건조(鄭健朝, 1823~1882)를 수행해 연행(燕行)을 다녀왔으며, 1874년에는 서장관(書狀官) 이건창을 수행해서 청나라에 다녀왔던 인재였습니다. 뛰어난 시문 실력이 있었음에도 과거 시험을 포기한 뒤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 1777~?)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했고,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遺囑)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 가있던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5년 남짓 시, 서, 화를 사사했던 분이였습니다.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창간했던 업적도 남겼습니다.

지운영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강위의 초상

한편 ‘육교시사’의 동인들 중에는 역관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청나라와 서양문물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국제적 동향에도 밝아 개화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선생이 사진과 같은 당시 첨단의 서양문물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 동호회에서 공부한 영향이라고 봅니다. 선생은 ‘육교시사’에서 시를 공부하고 창작하며 시인으로서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생은 여러 문집과 그림의 발문으로 다양한 한시(漢詩)를 남겼습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시, 서, 화 전승 인맥의 일원이었으니 그 실력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생의 지은 문집 『향추관집(香秋館集) 第二(제2)』에 실린 시를 한편 소개합니다. 사진술을 처음 접하고 그 감동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향추관집 제2편, 시의 지면

贈寫眞師平村德兵衛氏
森羅萬象寫如何捉影傳光巧法多奇絶君家明月鏡照人皆作百東坡

“사진사 헤이무라 도쿠베이(平村德兵衛)에게 드림
무성하게 늘어선 삼라만상(森羅萬像)을 어찌하여 촬영하나
그림을 포착하고 빛을 전하는 교법(巧法)도 많아라
기이하다 그대 집의 명월경(明月鏡)이여!
사람에게 비추자 뭇 동파(東坡)를 만드네”

사람의 얼굴을 명월경(明月鏡) 즉 카메라로 촬영하자 마치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처럼 훌륭한 사진을 만들어 낸다는 내용입니다. 사진을 빛과 그림자를 포착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또 이를 잘 이용하면 시(詩)처럼 창조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생의 사진철학이 담겼습니다.

참고로 헤이무라 도쿠베이(平村德兵衛)는 1870년부터 고베(新戶)의 하나구마치(花隈町)에서 사진관을 운영한 일본의 유명한 사진사였습니다. 지운영 선생에게 사진술을 전수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진을 가르치는 스승’이란 뜻의 ‘사진사(寫眞師)’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