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07/25/2019
/ salon

먼저 4장의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19세기 말 서구의 잡지나 신문 그리고 여행기 같은 책 등에 실린 사진으로 사진 설명이 “명성황후”로 나와 있는 예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4장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같은 시기 서구의 매체들에 실린 것으로 사진 설명이 굳이 번역하자면 “조선의 궁녀” 또는 “조선의 여인” 정도로 소개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위 사진들을 보면 일부는 사진 그 자체로 인쇄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사진을 보고 목판을 만들어 찍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고로 쓰인 원래의 사진은 전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같은 사진이 실린 문헌은 대략 1895년부터 1905년 정도 10여 년간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미국 등에서 발간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사진을 실은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책과 잡지만도 25종 정도가 넘습니다.

그 중 가장 앞선 것은 독일에서 발행한 『카톨릭 전교회지』 1895년 9월호입니다.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목판으로 인쇄해서 게재했는데, 사진 설명은 “조선 여인”이었습니다. 1895년 호주에서 발행된 영국 외교관 가드너의 저서 『조선』에도 같은 사진을 게재 했는데 이 책의 사진 설명도 “궁복을 입고 있는 조선 여인” 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프랑스 언론인이자 북경 특파원을 지냈던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1898년에 출판한 『조선 – 독립, 러시아 또는 일본』이란 책에는 “조선의 여왕”으로, 1904년 프랑스 신문 『르 투르 뒤 몽드 (Le Tour du Monde)』에 실린 기행문에는 “시해된 대한제국 황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진이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다양한 매체에 실려 있고, 더 나아가 사진의 설명도 제각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생각한대로 서양사람 누군가가 명성황후를 알현하고 찍은 사진이라면, 다시 말해 사진의 생산자가 분명하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고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여부와 진위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혼란은 1890~1900년대 당시 우리나라 관련 사진의 생산과 유통 경로가 원인입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관 광고 두 개를 소개합니다. 먼저 1904년 8월 25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기쿠타신(菊田眞)사진관>의 광고입니다.

만세 불변색의 사진을 소본으로부터 6척 이상의 대본까지 최 염가로 촬영함, 풍속, 경색, 기생들의 사진을 염가로 판매함

다음은 1905년 3월 13일, 3월 20일자 부산에서 발행했던 『조선일보』에 실린 <토비(土肥)사진관> 광고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아는 조선일보와는 다른 신문입니다.

土肥사진관 부산 幸町 2정목 전화 108번, 불변색 사진 급 한국풍속사진, 土肥耕美園 불변색 사진 병 한국풍속사진 각종 판매

1880년대부터 일본인 사진사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등에 진출해서 일본 거류민과 조선인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한반도 지배권이 강화되자 대거 진출하는 러시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초상사진 찍어주는 일이 본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을 방문하는 서양과 일본의 여행자들에게 한국의 풍속과 생활상 등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어 판매하는 일을 겸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 사진관들과 아주 극소수의 한국인 사진관이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서양 세계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의 여행자들 중에는 사진술을 익혀 직접 사진을 찍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진기술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 부피도 엄청 크고 무거웠으며, 유리원판의 무게와 가격 또한 여행자가 사용하기에는 버거웠습니다. 전문적인 사진가가 아니면 사진 찍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Illustrated London News』 같은 화보 신문이 파견한 사진기자 또는 『Underwood & Underwood』 같은 사진 공급 전문회사의 사진가 정도가 직접 사진을 찍었습니다. 서양의 일반 외교관이나 여행자가 사진을 찍어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학설은 그래서 어불성설입니다. 사진술의 역사를 모르고 말하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이국적인 취향과 세상의 모든 현상을 수집하기 원했던 당시 서양의 소위 교양인들은 여행을 하면서 현지에서 그 나라나 지역의 풍속과 풍광을 찍은 사진을 구매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사진엽서를 사서 모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구입한 사진을 갖고 가서 여행기나 화보잡지에 게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장이 형성되자 사진관들은 여행자들이 쉽게 만날 수 없거나 사진촬영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 희귀한 풍속, 한국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등을 찍고, 이를 다량으로 인화해서 팔았던 것입니다. 물론 광고도 냈습니다. 이처럼 사진관에서 상업적인 목적 하에 제작한 사진들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서구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정형화시키는 데 한 몫 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관한 다양한 서양의 저작들 수백 종에 똑같은 사진이 반복해서 실린 이유입니다.

이처럼 사진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언어 소통의 문제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예시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들도 매매되는 과정에서 의도적인 왜곡 또는 어쩔 수 없는 오해가 생긴 경우일 것입니다. 일본인 사진사들이나 한국 사진사들이 영어나 불어를 잘 할 리가 없었고, 통역이 있었을 텐데 당연히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진의 인물이 ‘황후’도 되었다가 ‘궁녀’도 되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서양 여행자들 또한 자기가 구입한 사진의 주인공을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소개했었을 것입니다.

최근 ‘명성황후’의 사진일 것이라고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이 사진 역시도 『The Illustrated London News』라는 영국의 그래픽매거진 1894년 7월 28일자에 “ATTENDANT ON THE KING OF COREA” 즉 “조선 왕실의 궁녀”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럼 ‘명성황후’의 사진을 실존 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의 종합입니다.

“ * 명성황후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생명의 위험을 받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왕비로 위장한 시녀가 대신 죽음으로써 살해될 번했던 위기를 모면했으며, 그 후 평상시에도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여의사로 명성황후를 자주 진료했던 언더우드여사는 측근이나 시녀들이 과민할 정도로 왕비를 보호했다고 했으며, 궁중 의사였던 알렌도 황후를 직접 진료한 적이 있는데, 전의들이 진맥한 것처럼, 발로 가리고 팔만 내밀어, 그것도 팔목 한 치 정도만 노출되었으며, 혀도 발 틈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 이로 보면 명성황후의 모습은 측근이나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상화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는 “특히 명성황후 사후에도 고종이나 조선 황실에서 황후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실존과 진위 여부의 판단은 여러 분의 몫입니다.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박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