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07/25/2019
/ salon

일제 치하에 있던 1935년, 『조선일보』의 1월 1일자 신년호에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진 두 장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렸습니다. 60년 전 설날을 지내는 풍습을 다룬 특집 기사 중 하나였습니다. 두 장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인지 여부로 지난 몇 십년간 숱하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진들입니다. 당시 신문의 기사를 요즘 말로 번안해서 그대로 옮겨봅니다.

「규중에 숨은 고운 각시들」
이것은 큰 머리에 큰 옷을 입은 육십년 전의 부인네 입니다. 지금 누군가 아가씨한테 보라면 저렇게 차리고 어찌 견디느냐고 할지는 모르지만 옛날의 부인네는 이 머리 이 옷으로 일평생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또 그중에는 이 머리 이 옷도 못 차리게 되어 일평생을 한탄으로 지낸 이도 없지 않습니다. 저고리는 젖가슴도 못 가리도록 짧지만 치마만은 두발을 푹 싸도록 지르르 끌리는 것이 꼴사납기도 하나 알지 못하게 옛 맛이 납니다. 이것은 남끝동 자지고름의 저고리와 스란치마를 입은 육십년 전 젊으신 아낙네의 옷맵시외다. 머리 뒤를 보십시오. 방망이만한 석류잠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육십년 전에 박힌 사진)

‘남끝동 자지고름’이라든지 ‘스란치마’ 같은 전통 한복의 용어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복식사전에 따르면 ‘스란치마’란 스란단을 단 긴 치마로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예복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자지고름’은 일제시기에 지금 쓰는 ‘자주고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60년 전 그러니까 1895년경에 찍힌 것으로 위의 사진은 부인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누구나 입을 수 없던 왕실이나 반가의 규방 아가씨들이 평생 입고 지낸 복식으로 자못 옛 맛이 난다는 설명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는 방망이만한 머리의 장식이 너무 커서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기 참 어려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사가 실린 때가 1935년이니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두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라거나 당시의 표현으로 ‘민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한말 ‘규중의 고운 각시들’의 사진이라는 정도로 서술했습니다. 일반 여성은 아니고 지체 높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보호를 받는 여성들 정도로 알고 기사를 썼고, 그것도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과거의 옷 입는 풍습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두 장 사진에 찍힌 인물을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두 장의 사진을 두고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진위논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두 장의 사진이 후보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논란의 인물사진 세 장을 소개합니다.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 후보로 그 동안 학계나 언론 등에 거론된 사진입니다

‘남끝동 자지고름’이라든지 ‘스란치마’ 같은 전통 한복의 용어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복식사전에 따르면 ‘스란치마’란 스란단을 단 긴 치마로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예복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자지고름’은 일제시기에 지금 쓰는 ‘자주고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60년 전 그러니까 1895년경에 찍힌 것으로 위의 사진은 부인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누구나 입을 수 없던 왕실이나 반가의 규방 아가씨들이 평생 입고 지낸 복식으로 자못 옛 맛이 난다는 설명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는 방망이만한 머리의 장식이 너무 커서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기 참 어려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사가 실린 때가 1935년이니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두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라거나 당시의 표현으로 ‘민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한말 ‘규중의 고운 각시들’의 사진이라는 정도로 서술했습니다. 일반 여성은 아니고 지체 높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보호를 받는 여성들 정도로 알고 기사를 썼고, 그것도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과거의 옷 입는 풍습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두 장 사진에 찍힌 인물을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두 장의 사진을 두고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진위논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두 장의 사진이 후보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논란의 인물사진 세 장을 소개합니다.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 후보로 그 동안 학계나 언론 등에 거론된 사진입니다

사진1

사진2

사진3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된 이미지는 <사진1>입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가 1904년 감옥에서 집필했고, 1910년 미국에서 출판한 『독립정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에서 출판해서 인지 당시로는 드물게 자료 사진을 많이 실었습니다. 여기에 <사진1>이 ‘명성황후’라는 캡션을 달아 소개되었고, 1970년대까지는 ‘명성황후’의 이미지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립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진의 빈티지프린트를 소장한 <한미사진미술관>도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사진2>가 발견됩니다. 프랑스에서 1898년 발간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의 책 『La Coree Independante, Russe ou Japonaise』에 실린 여러 삽화 중에 있는 이 사진의 캡션이 ‘한국의 황후(La Reine De Cor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책이 소개되자 많은 국사학자들이 이 사진이 바로 ‘명성황후’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1977년부터는 국정 한국사교과서에 실리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하신 이태진 교수가 대표적인 분입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생겼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0년대에 들어와 교과서에서 삭제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습니다.

이상 두 장의 사진이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확정되지 못하자 최근에는 <사진3>이 맞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개 2006년 무렵부터였습니다. 빈티지프린트가 제가 잘 아는 영국의 ‘한국역사사진’ 컬렉터인 테리 버넷(Terry Bennett)의 소장품에 있습니다. 테리는 이 사진의 인물이 원본 사진을 배열한 앨범에 고종황제 및 순종, 대원군 등과 같은 위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물의 배경 화면이 다른 사진과 같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 또한 다른 기록에는 ‘조선 왕실의 시녀’로 설명되어 있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습니다.

왜 이런 혼란이 지속되는 것일까요? ‘명성황후’는 실제 사진을 찍었을까요? 그렇다면 사진은 실존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동서양의 각종 관련 기록들을 전수조사하고, 당시 사진의 유통 경로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살롱에서 의문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