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사진사 이홍경
07/25/2019
/ salon

여인의 초상-경성사진관-1920년 추정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당시 종로 인사동에 있던 <경성사진관>에서 찍은 여성의 초상사진입니다. 현재 <한미사진미술관>의 소장품이고, 1998년 <한국사진사연구소>가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주최한 ‘한국사진역사전’에서 처음 소개한 사진입니다. 한복을 차려입고 웃는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젊은 조선여성의 사진으로, 대지에 인화한 사진을 붙였고 이래 부분에는 사진관 이름과 사진사 이름이 박혀 있습니다. 우측에는 인사동 <경성사진관>이란 이름이 영어와 한자로 있고, 전화번호가 479번이라고 찍혀 있습니다. 좌측에는 전각의 형태로 채상묵(蔡尙黙)이라 적혀있고, 그의 검증을 통과했다는 뜻의 심사제(審査濟)란 단어가 적혀 있습니다. 여성사진사 이홍경(李弘敬)의 작품입니다.

신분이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일정한 경제력을 갖추면 사진을 찍어 자신의 초상을 누구나 갖게 된 것은 대략 1910년대부터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는 대부부의 계층은 남성이었고, 암묵적인 사회적인 규제로 해서 여성들의 사진관 출입은 불가능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당시의 사회통념은 남성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내밀한 곳에서 여성이 사진기 앞에 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여성들은 스스로 자율적인 결정에 의해 주체적으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구한말이나 일제 초기 여성을 찍은 사진의 대부분이 궁녀이거나 기생이었습니다. 사진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모델로 위치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홍경이 사진사로 활동했던 시기에도 새아씨나 규수들은 남성들을 기피하고 여자사진사들 앞에서만 사진 찍기를 원하던 내외법이 잔존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홍경은 여성으로 사진사라는 근대적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여성들에게 사진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사진기 앞에 세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이홍경의 등장 이후 여러 여성 사진사들이 근대교육을 통해 등장했습니다. <황성기독청년회학교(YMCA)>에 교육 과정에 설치한 ‘사진과’나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사진학강습원> 또는 여러 기관이 야간으로 설치한 속성 사진학교 등을 통해 남성들과 함께 여성들도 사진교육을 받고 ‘사진사’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1921년 『동아일보』의 광고 그리고 1927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는 1919년과 1921년에 지금의 종로 일대인 북촌에 한 사진사가 두 군데의 사진관을 설립해 운영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으로 두 번째 여성사진사였던 이홍경(李弘敬)이었습니다. <YMCA> 사진과에서 사진술을 익힌 이홍경은 1919년 남편인 채상묵(蔡相黙)과 함께 북촌의 인사동에 <경성(京城)사진관>을 설립했고, <근화여학교>에서 사진 강의도 했던 선구적인 근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앞세워 인사동에서 <경성사진관>을 운영하던 이홍경은 1921년 인사동 바로 옆 동네인 관철동에 여성고객 위주의 <조선부인(朝鮮婦人)사진관>을 열어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개업광고를 소개합니다.

개업광고

신문화를 건설하며 새 사업을 이루려는 우리 사회에 오직 그 요소인 예술적 관념이 결핍하옴은 우리의 항상 감탄하는 바인 줄로 생각하와 본인이 이에 다년 연구하온 결과 금춘(今春)을 기하여 좌기 장소에 초상과 사진업을 개(開)하옵고 삼천이백 촉(燭)의 전기를 응용하와 정선(精鮮)한 기술로써 요구하시는 대로 수응하겠삽기에 광고하오니 사해(四海) 신사숙녀 제위는 ‘여자 사업계’에 첫 걸음임을 널리 애고찬동(愛顧讚同)하시어 일차 시험하여 주심을 업대여 바라나이다.

경성부 관철동 75번지 조선부인사진관 주 이홍경

‘여자 사업계’의 첫 걸음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관철동에 있던 이홍경의 <조선부인사진관>은 여성 고객 중심으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여성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고에서 보듯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던, 다른 남성사진사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했던 사진관이었습니다. 충무로나 을지로 지역에 주로 있던 일본인 사진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위적 시도였습니다.

1927년 5월 18일자 『조선일보』는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라는 시리즈 기사에서 이홍경의 직업 철학과 여성사진사로서의 장점 등을 소개했고, 사진사는 여성에게 적절한 직업이라는 이홍경의 말을 직접 게재했습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것이니, 제일 두뇌가 영민하여 배경을 잘 보며 성품이 꼼꼼하여 수정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점에서 보던지 사진사는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적당한 직업 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이 아직도 내외가 심한 구가정의 새 아씨나 규수들의 촬영은 반드시 여자 사진사를 요구할 것이 옳시다.”

이홍경과 <조선부인사진관>은 한국의 여성이 근대적 직업인으로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적인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첫 번째 여성사진사는 <천연당사진관> 주인이었던 해강 김규진의 부인 향원당(香園堂) 김진애(金眞愛)였습니다. 해강이 여성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 부인에게 촬영술을 가르쳐서 사진사로 데뷔시켰던 것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