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주인공 『카메라예술』의 발행인 천재성(天再成)
07/25/2019
/ salon

카메라예술 창간호 1967년 10월호

근대사회는 본질적으로 각자가 맡은 바 사회의 제 영역에 걸친 다양한 직업들로 이루어지고, 각 직업은 그에 따른 가치와 윤리가 있습니다. 그 가치와 윤리는 상호 보완적일 수도 있고, 상호 충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급박한 화재의 현장에 있을 때 소방관은 불을 끄고 인명을 구조하는 역할을 사명감을 갖고 성실히 수행함이 그 직업의 윤리이고, 현장의 사진기자는 불을 끄는 일을 돕지는 않지만 열심히 취재하고 사실을 신속하게 전달해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직업윤리입니다. 현장의 사진기자에게 왜 인명 구하는 일을 우선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실익보다 명분을 쫓다보면 망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 버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업가의 냉철함은 그 자체로 미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가는 법적 테두리 내에서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이 그 직업의 가치이고 윤리적입니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재화를 늘려 자신의 부를 일구지만 그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고 하면서 사회를 이롭게 합니다. 1968년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사진전문 잡지 『카메라예술』의 편집인이었던 천재성(天再成)이라는 분은 이름처럼 사업에는 천재성(天才性)이 있었으나, 사업가로서의 직업윤리 의식은 부족했었나 봅니다. 잘나가던 사업가가 돈이 안 되는 문화적인 일에 뛰어들었다가 망해버렸습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실 앞서 소개한 <대한사진문화사> 발행의 『사진예술』은 1966년 당시 DP&E 업계의 화제 인물이었던 천재성(千再成)이란 분을 꼬드겨 1956년도에 발행했던 『사진문화』를 다시 발간하려고 했던 조명원의 작품이었습니다. 천재성은 1950년대 말 충무로에 <미야사(美也社)>라는 DP&E 점을 운영했고, 사업이 번창해서 서울 시내 전역에 29개의 체인점을 내고 운영했던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사진계의 상황을 잘 아시는 여러 원로들의 증언과 천재성의 회고를 종합해 보았습니다. 창간 당시 『사진예술』은 대외적으로 변종관이 회장, 조명원이 사장, 천재성이 부사장으로 되어있었습니다. 변종관은 광고를 줄 수 있는 큰 사업가여서 회장으로 모셨고, 조명원은 실제 잡지를 만들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창간 과정과 계속 발행의 비용을 전적으로 대고 실질적으로 경영한 분은 바로 천재성이었습니다.

천재성이란 분은 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보낼 때 카메라 상점에서 사진 관련 상거래를 익혔고, 전후 서울로 환도한 후 디피점을 내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950년대 말에는 사진 붐을 타고 ‘디피점’을 만들어 하루에 1만장의 사진을 제작해 내는 이 분야의 신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충무로에 본점을 두고, 서울 시내 삼선교, 숭인동, 문화동, 성동역 앞, 비원 앞, 용산중학교 입구, 뚝섬 버스종점 앞, 혜화동, 원남동, 삼각지 등 버스 정류장이나 전차 정류장 부근까지 목 좋은 곳에 수많은 체인점을 열었다고 합니다. <미야사> 체인을 운영하면서 광고에도 열중했는데, 극장 광고와 텔레비전 광고까지도 했었습니다. 천재성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미야사>는 한 달에 십만 원 정도의 광고비를 지출했다고 합니다. 조명원 선생은 이 금액 정도만 투자하면 잡지를 발행할 수 있고, 그 자체로 광고효과는 훨씬 클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천재성을 성공으로 이끈 DP&E점이란 보통 ‘디피점’이라고 불렀는데, 사진에 관한 종합서비스 업종이었습니다. ‘디피점’이란 영어로 ‘Development, Printing & Enlargement’ 의 앞 글자를 딴 약자로서, 말 그대로 필름 현상, 인화, 확대 서비스를 해주는 가게를 말합니다. 1980년대 컬러 사진이 대세가 되어 40~50분 만에 현상과 인화를 다해주는 QS(Quick Service) 가게가 나와서 유행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진관은 디피점을 겸했습니다. 대부분 흑백을 쓰던 시절의 유산입니다. 손님이 촬영한 필름을 맡기면 현상을 해주고, 현상한 필름을 밀착 인화를 해서 보여주고, 그 중 잘나온 사진을 인화해서 사진을 넘겨주는 일을 해주는 업종이었습니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 필름을 팔 때 카메라까지 같이 대여해주기도 했습니다. 새 필름을 장착한 카메라를 빌려서 졸업식이나 소풍을 가서 사진을 찍고, 카메라 채로 ‘디피점’에 갖다 주면 3~4일 후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시절 디피점에서 빌린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잡지는 창간 후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칩니다. 조명원과 천재성이 생각하는 잡지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고, 잡지의 발간 비용 또한 엄청나게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진예술』을 3호까지 발행한 후 천재성은 조명원 선생을 해고하고, 본인이 편집인이 되어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잡지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디피점은 잘 했을지 모르나 잡지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나왔을 리가 없었고, 월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통합 호 형식으로 겨우 몇 달 간격으로 두 번 더 발행했습니다. 당시 잡지에 관한 법령에는 월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무단으로 발간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폐간된다는 규정이 있었고, 복간을 신청해도 기존의 제호는 다시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 번, 두 번 정도면 봐주는데 휴간 신청도 없이 3~4회 내지 못한 『사진예술』은 자동 폐간되었습니다. 잡지 전문가가 없었던 탓입니다.

잡지를 계속 내려던 천재성은 『사진예술』의 제호는 다시 쓰지 못하게 되자 잡지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잡지가 『카메라예술』이었습니다. 이 잡지의 첫 호 판권 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 『카메라예술』 제1호/발행일 : 1967년 10월 1일/등록번호: 라 933/발행인: 변종관/편집인 : 천재성/발행소 : 대한사진문화사,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가 55/정가 : 200원”

1967년 10월 1일 발행, 등록번호 ‘라-933호’였습니다. 당시 문교부(오늘날의 문화부와 교육부를 합친 정부부처)가 등록을 받던 기관이었습니다. 참고로 『사진예술』의 등록번호는‘라-775’이었습니다. 창간호 표지는 훗날 한국 광고사진의 개척자이자 전설로 얼마 전 작고한 김한용(金漢鏞, 1924~2016)선생이 찍은 염소 사진으로 장식했습니다. 『카메라예술』은 통권 제1호로 다시 창간했으나, 겉으로는 제호만 변경되었지 어디에도 잡지를 새로 발행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예술』과 『카메라예술』을 합쳐 1968년 12월 호인 통권 30호, 실제로는 17권을 끝으로 종간하고 말았습니다.

카메라예술 창간호 1967년 10월호

1968년부터 『카메라예술』의 편집장을 맡아 천재성을 대신해 잡지를 제작한 분은 임범택(林範澤, 1938~ )선생이었습니다. 작고하신 한국사진의 거두 임응식(林應植, 1912~2001) 선생의 장남으로 더 유명하신 분입니다. 고 최인진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이분의 증언에 따르면 잡지 한 권 발행 할 때마다 <미야사> 분점이 하나씩 없어졌다고 합니다.

“변종관이 발행인이었으나 조명원이 다 했다. 변종관은 돈을 대지는 않고 천재성이 돈을 댔는데, 이름만 대외적으로 명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고 계약을 했다. 처음에는 충무로 2가 기쁜소리사 앞 <미야사> 본사 2층에서 창간을 했는데, 나중에는 자꾸 자금이 딸리니까 서울 시내에 <미야사> 분점이 20여개가 넘게 있었는데, 잡지 한 권을 발행할 때마다 분점 하나씩을 팔아야 했다. 1년 남짓 하는 동안에 지점이 14개가 없어졌다. 1960년대는 한참 사진 붐이 일어나고 있을 때니까 디피점이 잘되어 <미야사> 분점이 많았는데, 이런 저런 일들로 천재성이 잡지에 손을 대 결국 망한 것이다.”

전문적이지도 않았고 본업과 어울리지도 않았던 일에 뛰어든 대가가 무척 컸습니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훗날 천재성은 역시 고 최인진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잡지는 내 의도대로 운영하는데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3백만 원이 투자 된 가운데, 조그만 디피점에서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카메라예술』 5호, 통권으로 12호까지는 그런대로 있는 돈 가지고 끌고 나갔으나 그 후부터는 점포 하나씩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어느 때는 분점이 두 개가 없어진 적도 있었다. 분점 하나에 보증금이 보통 20만원, 25만원, 싸구려는 15만원도 있었다. 가게를 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급해서 보증금을 빼오는 것이었다. 용산중학교 앞에 있던 점포가 잘 되었는데 그것을 제일 마지막에 처분했다. 하나 하나 문 닫으면 그 돈은 인쇄소에 집어넣고, 잡지 한 호 나오면 <미야사> 분점이 처분되는 것과 정비례되었다. 나는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 <미야사>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 처음부터 끝까지 했으나 잡지도 망하고 <미야사>도 문을 닫고 말았다.”

마지막 호의 표지 이미지는 종교적이어서 종말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조명원, 변종관, 천재성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발행한 잡지는 1960년대 후반 한국사진의 작가와 작품, 사진이 처했던 사회문화적 상황을 적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