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잡지 『寫眞藝術』의 편집인 조명원(趙明元)
07/25/2019
/ salon

사진예술 창간호, 1966년 8월

조명원 선생이 앞의 글에서 소개한 『’66 한국사진연감』을 발행한 것은 1966년 6월 30일이었습니다. 발행처는 50년대 『寫眞文化』를 냈던 <한국사진문화사>입니다. 잡지는 1957년 이후 나오지 않았지만 선생이 출판사 등록과 이름은 그대로 갖고 있었고, 단행본을 출판하는 일은 계속했습니다. 사진에 관한 전문 교육기관이 전혀 없었고 마땅한 입문 교재도 없던 시절에 사진술의 저변 확대를 위해 출판 사업은 계속했던 것입니다. 잡지가 망한 뒤였기 때문에 거의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1인 출판사였습니다. 그 결과 몇 권의 기초 기술서적이 한국사진사의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잡지를 제외한 단행본은 현재 확인한 바로 총 4권으로 연감을 제외하고는 일반 입문 기술서입니다. 1961년에는 출판사를 저자로 하는 『캬메라 첫걸음』이란 책을 『寫眞文化』의 임시 증간호로 출판했고, 1967년에는 같은 책을 같은 이름으로 <평화문화사>라는 대구의 한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사진문화사>가 발행한 마지막 책은 저자를 ‘조명원’으로 해서 1969년에 나온 『초등사진교본』이라는 사진기초 서적이었습니다. 세권의 책 은 같은 내용을 증보하는 형식으로 나왔기 때문에 전체 구성과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준비편」, 「촬영편」, 「현상편」, 「밀착편」, 「확대편」 그리고 부록으로 「사진용어사전」 등 5개의 항목으로 구성했고, 카메라 조작법부터 확대 인화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진을 찍고 만드는 전 과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예술 창간호, 1966년 8월

이런 과정에서도 조명원 선생은 사진잡지의 출판에 관한 꿈을 접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잡지의 복원을 시도했고, 자신의 재정적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았기에 다른 재정적 후원자를 물색했습니다. 그 결과가 1966년 창간된 『寫眞藝術』이란 사진전문 잡지였습니다. 연감을 발행하고 두 달 후인 1966년 8월호인 창간호가 <대한사진문화사>란 출판사 명의로 발행되어 8월 1일부터 서점가에 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잡지 크기는 사륙배판 257×182㎜였고, 분량은 124면 내외였습니다. 판권 란에 따르면 발행인은 변종관, 편집인 조명원으로 되어 있고, 발행처인 <대한사진문화사> 회사 소개란에는 회장 변종관, 사장 조명원, 부사장 천재성, 편집위원 신상우, 편집부장 김열수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寫眞藝術』 경영진에서 잡지 제작에 관한 경험을 갖고 있던 사람은 ‘사장’이자 ‘편집인’으로 있던 조명원 선생이 유일했습니다. 당연히 잡지 발행을 주도했습니다. ‘발행인’이자 ‘회장’인 변종관은 당시 국산 인화지와 현상 약품 등 사진관련 제품을 생산했던 <대한사진화학공업사>를 운영하던 분이었습니다. ‘부사장’으로 등록되어 있던 천재성(天再成)은 당시 충무로에 미야사(美也社)라는 DP&E 점을 중심으로 29개 체인점을 거느린 사진업계의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잡지를 낼 경제적 여력이 없던 조명원 선생이 사진업계의 성공한 사업가 두 분을 설득해서 잡지를 창간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진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야사(美也社)의 주인이었던 천재성의 기여가 컸다고 전해집니다.

1948년 창간한 『寫眞文化』는 <조선사진문화사>, 1956년 창간한 『寫眞文化』는 <한국사진문화사>, 1966년 창간한 『寫眞藝術』은 <대한사진문화사>로 발행처가 되어있습니다. 잡지 발행을 위해 회사 하나를 새로 만들어 등록을 했던 것입니다. ‘조선’이란 단어는 전쟁 이후 북한의 전유물이 되었고, ‘한국’이란 단어는 조명원 선생이 회사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사용할 수 없고 해서 <대한사진문화사>란 이름이 만들어졌습니다. 잡지의 이름을 ‘문화’ 대신 ‘예술’로 바꾼 것은 당시 법령에 따라 기 사용된 제호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잡지 등 정기간행물 진흥에 관한 법률”에는 기존 잡지가 폐간되고 2년이 경과하면 다른 사람이 그 제호를 사용할 수 있지만, 당시는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寫眞藝術』 역시도 먼저 발간되었던 두 번의 『寫眞文化』와 내용이나 형식이 매우 유사합니다. 편집인 조명원이 바로 1956년의 『寫眞文化』 발행이었고 발간의 전 과정을 주도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10년의 간격을 두고 창간된 두 잡지가 여러 점에서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창간호의 표지의 사진에서 부화하는 병아리를 게재해서 잡지의 창간을 의미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1956년 잡지 창간호에도 사용한 병아리 부화 장면 사진의 데자뷰입니다. 창간호를 내면서 십만원 현상 제1회 ‘사진예술종합상’ 제도를 운영했고, ‘한국사진사 편찬’과 ‘사진모델 모집’ 그리고 ‘사진예술동우회’ 회원을 모집하는 사업을 펼치기로 계획하는 점도 조명원 선생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寫眞藝術』이 창간해서 통권 3호를 발간하고 조명원 선생은 잡지사에서 퇴출되고 맙니다. 자본을 대는 변종관이나 천재성 입장에서 잡지 사업이 조명원 선생의 장담처럼 잘 되지 않고 계속 적자가 나자 배신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천재성이 70년대 후반 고 최인진 선생과 했던 대담에서 토로한 사실입니다. 이 잡지는 조명원 선생이 퇴출당한 이후 4호부터 7호까지 발행되었는데, 실제로는 4호와 5호의 합병호 그리고 6호와 7호의 합병호로 나왔기 때문에 총 5권이 나오고, 그 후 『카메라예술』로 제호가 바꾸었습니다. 열심히 ‘사진전문잡지’의 꿈을 좇던 조명원 선생은 더 이상 잡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조명원 선생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왜정 때인 1939년이었습니다. 1939년 3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선생의 이름이 처음 나옵니다. 「鄭 趙 양씨 작품 일본사진연감 입선」이란 제목의 기사에서입니다.

“<아사히신문사> 발행 소화 14년도 『일본사진연감』에 정몽석 씨 작품 <오소레미>가 입선되었다 한다. 일본사진연감이란 13년도 사진 중에서 선발된 최우수작품집으로 일본 사진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조선에서 여기에 입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정씨 작품 외에 동경에 있는 조명원 씨의 <겨울의 종노>가 함께 입선되었다 한다.”

이 기사는 이미 1930년대 후반 조명원 선생이 일본에 유학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였음을 말해줍니다. 당시 일본의 사진연감에 작품이 실릴 정도면 실력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광복 후 귀국해서 다양한 사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해방 직후 충무로에 있던 갤러리인 <대원화랑> 1층에서 사진재료상을 하면서 『寫眞文化』의 창간호와 9호의 표지 사진을 맡아서 실었고, 같은 잡지의 2호(필터어와 그 효과-상), 3호(필터어와 그 효과-하), 9호(「코-텟트랜스」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12호(「캬논」 캐머라를 써보고서-) 등에 필터와 렌즈 그리고 카메라에 관련된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또 해방 공간의 사진가 단체인 <한국사진회>와 <한국사진작가단> 설립을 주도하는 활동도 했습니다.

1958년 조명원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寫眞文化』 1958년 11월호에 「한국사단 이면 천일야화」라는 글을 썼습니다. 해방 후 자신이 경험한 한국 사진계의 흐름을 정리한 글이었습니다. 훗날 이글이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연구자에게는 6.25 전쟁 전후 한국사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사료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선생의 흔적을 알 수 없어 아쉽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