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사진사(寫眞師) ‘백골사진사건’의 전말
07/25/2019
/ salon

390611 렌스1개로 살해

왜정 때인 1930년대 말은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우리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로 진입하던 시기입니다. 1937년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한반도의 정세가 태평양전쟁을 향해 가면서 모든 재화와 물자가 전쟁에 투입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 민중의 삶은 궁핍해졌고, 다양한 생계형 범죄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카메라와 렌즈는 엄청난 고가품이었고 당장 현금화하기 쉬운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의 표적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왜정 말기의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카메라 관련 절도 사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렌즈는 더 귀중품이었습니다. 카메라 본체는 국내 업자들이 정교하게 만들어 공급하고 있었고, 일본에서 만든 것도 많이 들여와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의 품질을 좌우하는 렌즈는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았고, 일본도 제대로 된 렌즈를 생산하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진관이나 호사가들이 사용하던 렌즈는 대부분 독일제였고, 가격 또한 무척 비쌌다고 합니다. 사진사가 소유한 렌즈를 노린 절도 행각이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939년 6월 11일자 『매일신보』 사회면에는 「동대문경찰서 소년사진사 백골사건 전모」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렌즈를 노린 ‘강도살인사건’의 전말을 보도한 내용입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때는 해당 기사가 실리기 한해 전인 1938년 7월 8일이었습니다. 지금 서울의 정릉동 근처 야산에서 종로의 도렴동에 있던 문화사진관(文化寫眞館)의 견습생으로 일하던 당년17세의 소년 사진사 이동만(李東滿) 군이 백골(白骨)의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문화사진관의 주인인 사진사 이자순(李子淳)의 차남이었습니다. 7월 8일 실종됐고, 사체가 발견된 것은 두 달 이상이 지난 9월 16일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관할인 동대문경찰서에서 수사를 진행했으나 사건은 거의 1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고 오리무중의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무렵 진범이 검거되었고,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살인범은 놀랍게도 두 명의 형제였습니다. 신문에 범인 한명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주범은 충남 당진 출신의 당시 34세의 안병구(安秉球)였고, 공범은 그의 친동생인 당년 25세의 안병선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살인사건을 벌이고 나서 잡히지 않았지만, 다른 절도죄로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사건 해결이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경찰의 노력으로 진범이 밝혀졌습니다. 형은 절도죄를 복역하고 만기가 되어 출소하던 중 다시 체포되었고, 동생은 복역 중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문 기사에 나온 경찰의 취조 내용에 따르면 이들 중 특히 동생은 사진과 카메라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렌즈를 훔치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절도 전과도 갖고 있던 전문 절도범들이었고, 렌즈 하나만 있으면 이것을 팔아 오랫동안 마음껏 생활할 수 있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렌즈를 갖고 있는 사진사를 노린 이들은 사진관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출장에 나가는 ‘출장사진사’를 물색해 범행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첫 범행의 대상은 지금의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연예사진관(硏藝寫眞館)의 홍종환(洪種桓)과 윤자경(尹滋敬) 사진사 두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출사 영업을 위해 장충단공원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공원으로 출장 나가서 고객에게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일은 당시 사진사들의 주요 영업 형태였습니다. 현재 이런 영업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관광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었고, 지금도 가끔 대학 졸업식 같은데 가보면 출장 사진사들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범인들은 사진을 찍자고 이들을 서소문 쪽으로 유인했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범행 대상은 종로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만난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던 영생사진관(永生寫眞館)의 사진사 원경선(元敬善)이었습니다. 돈암동에 출장 와서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가족사진을 찍어달라고 유인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원경선을 만난 범인들은 이 사진사가 외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범행을 포기했습니다. 외아들을 살해하거나 다치게 하면 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참으로 어처구나가 없습니다.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른 이들이 외아들은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같으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1960~80년대까지 외아들은 군대를 면제받거나 복무 기간에서 큰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범인들이 세 번째로 물색한 대상이 바로 사체로 발견된 이동만 사진사였습니다. 형인 안병구가 안면이 있던 사진사를 찍었고, 가족사진을 찍어달라며 출장을 가지고 유인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사를 지금의 진관외동의 북한산 자락으로 끌고 가서 막대로 머리를 쳐 살해했습니다. 시체는 돌로 쌓아 안보이도록 하고, 카메라에 달린 독일제 렌즈를 갖고 도망친 것입니다. 범행 후 이들은 시내로 들어와 연예사진관 홍종환 사진사의 이름으로 창신동의 중천(中川)전당포에 렌즈를 맡기고 45원을 받았습니다. 전당포에서 물건을 받을 때 신원을 확인하는데, 사진사를 도용해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돈을 챙긴 이들은 왕십리와 휘경동 등지에서 주색잡기로 다 써버리고 다시 절도 행각을 벌이다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살인 도구인 막대기(스틱)와 충청도 사투리가 빌미가 되어 잡힌 것입니다.

이 사건에는 문화사진관, 연예사진관, 영생사진관 등 당시 서울 시내 사진관들의 이름과 사진사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진관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렌즈의 이름은 모르나 독일제인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 사진관에서 많이 썼던 텟사(Tessar) 렌즈로 추정됩니다. 세계적인 광학회사인 칼 싸이즈에서 1902년부터 발매한 이 렌즈는 사진관용으로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제품입니다. 이렇듯 언뜻 단순하게 보이는 살인사건에도 사진 역사의 원료들이 존재합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