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당사진관과 외상값
07/25/2019
/ salon

천연당 개업광고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관은 대한국사진사(大韓國寫眞師)이자 유명 서화가(書畵家)였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1907년 처음 설립한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일 것입니다.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과 태평로 2가 및 을지로 1가에 걸쳐있던 석정동(石井洞)에 살던 김규진은 자신의 집 사랑 뒤 정원에 사진관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사진관은 청일전쟁 후 진출한 일본인 사진사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인 사진사로는 거의 유일하게 김규진과 그의 동업자였던 박주진(朴胄鎭)이 ‘천연당’이란 이름의 사진관을 내고 영업을 했었습니다.

1880년대에 김용원이나 지운영 같은 선각자들이 사진관을 개설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민중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하고 해방 이후까지 같은 이름의 사진관이 지속되었던 곳은 ‘천연당’이 유일합니다. 사진관은 초창기 엄청나게 호황을 누렸다고 합니다. 사진관 개설 다음 해인 1908년 음력 정월 한 달 동안에 천여 명 이상의 고객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김규진의 사진관을 찾았고, 미처 손님을 다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 이전 시기의 천연당사진관에 관련한 역사적 사료가 많은 이유는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에 사진관 관련 기사가 많이 게재되었고, 천연당사진관은 이 신문에 사진관 광고를 수시로 많이 냈기 때문입니다. 사진관과 신문사가 서울의 석정동(石井洞) 즉 오늘날의 서울시 중구 소공동의 서울시청 앞에 가까이 같이 자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월 무렵부터 황단(원구단) 아래 신작로 석정동 초입 북편 3층 양옥에서 신문을 발행했었고, 천연당사진관도 같은 해 2월 황단 아래 신작로 변에 있던 김규진의 집에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무척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이웃이었습니다.

‘천연당사진관’과 ‘대한매일신보’가 같은 동네인 석정동에서 개업한 1907년에 이 신문은 최대의 부수를 발행하면서 일본의 조선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거침없이 쏟아 내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대응해 일제는 ‘신문지법’이란 것을 만들어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한국의 언론을 탄압했고, 당연히 신문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은 ‘대한매일신보’에 사진관 영업 광고를 내게 되고, 이 신문 역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사진관의 지근거리에서 취재한 기사를 지면에 게재하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일제 조선통감부의 책략에 의해 폐간되는 1910년까지, 이 신문에 ‘천연당사진관’에 관련한 기사와 광고가 거의 40회 정도 실렸습니다. 개업 광고부터 사진관 신축, 이전 내용까지 다양한 소식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사진 대금과 외상값에 관한 기사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식민지배 직전 당시 한국 사회와 사진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사의 원문을 이해가 쉽도록 요즘 글로 바꿔 소개합니다.

 

먼저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29일자에 실린 ‘천연당사진관’ 광고입니다.

“제목 : 천연당사진관 사진대금 독촉과 선금 또는 반수 이상 선입 광고

각급 사회, 학교, 개인 등 동포 형제께옵서 본 사진관을 애호하심을 감사하거니와, 사진대금을 술값(酒債)과 동일시하여 근년에 갚지 않는 분이 수백 처에 달해 수습할 방법이 없고, 외국상점의 사진 재료비에 대한 독촉이 심하온 즉 난유지이옵기(유지가 어려운 상황이니) 간절히(懇乞) 광고하오니 진심으로 수호하시는 첨군자(고객)는 인차정세(憐此情勢, 상황을 헤아림)하시고 수송교(隨送交, 대금을 갚음)하시와 영구 유지케 하심을 절망(切望)이오며, 종금(금일) 이후로 방문하시는 동포에게는 선금 혹 반 이상을 선입(先入)하고 증을 교환한 후에 입장 촬영할 줄로 광고함.”

두 번째 ‘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1일자 기사입니다.

“제목 : 갚을 것이지
대한에 아름다운 사진관은 ‘천연당’ 하나인데 각 사회와 여러 학교에서 사진 박힌 제씨가 대금을 해가 넘도록 갚지 아니함으로 신문에 광고할뿐더러 수십 차 사람을 보내되 하나도 보내지 아니하여 장차 영업을 폐지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보조는 못할지언정 줄 것도 아니 주는 것은 실로 인색한 일이라고 비평이 있다더라.”

세 번째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29일자 기사입니다.

“제목 : 폐지지경(폐업할 지경에 이름)
사진하는 기술이 세계에 많은데 한국인 중에는 김규진 하나가 경성에 ‘천연당사진관’을 설치하고 영업한지가 지금 삼년이 되었는데, 근 일에 사진을 박혀가는 제씨들이 대금을 갚지 아니 함으로 사진관을 폐지할 지경이 된지라 일반 동포로 찬성치는 못할지언정 방해되게 함은 옳지 않다는 물론(이야기)이 있다더라.”

네 번째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7일자 기사입니다.

“제목 : 도적놈 한 가지
리승봉 등 삼인이 ‘천연당사진관’에서 외상으로 사진을 박히고 그 후에 와서 사진을 달라하는지라 그 관주는 의례히 사진 값을 갚을 줄로 알고 의심 없이 내어준 후에 마침 손님을 응접하는데 승봉 등 세 사람이 그 기회를 타서 피신하여 도망하였다더라.”

다섯 번째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22일자 기사입니다.

“제목 : 촉망 중에
리승봉 씨 등 삼인이 ‘천연당’에서 사진대금을 주지 않고 갔다함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리 씨가 몰래 도망한 것은 아니오 촉망 중에 잊어버리고 갔다가 그 대금을 즉시 보내었다더라.”

 

이 기사들을 읽어 보면 많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서울에 한국인의 사진관은 ‘천연당’이 유일했다는 사실, ‘천연당사진관’ 개업이 1907년이었다는 사실, 사진 값을 술집 외상값 정도로 알고 있다고 탄식할 만큼 한국인들의 사진에 대한 인식이 척박했다는 사실, 어쩔 수 없이 선금을 받고 사진을 찍어 주게 되었다는 얘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당시 사진대금은 후불이었다는 사실, 인화지나 유리원판 등 사진재료의 공급은 일본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사실, 미수금으로 인해 ‘천연당’이 폐업 위기까지 갔다는 사실, 신문에 기사가 나자 떼먹은 사진대금을 즉시 갚을 만큼 신문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 등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