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의 사진과 매휘립
07/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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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 :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 등을 썼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를 지낸 오응현(吳膺賢)이고, 아들은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했고,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했다. 1846년(헌종12) 역과(譯科)에 합격해 역관으로 활동했고, 1853년(철종4) 4월 북경 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를 방문한 이래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신지식을 습득하고 전파해서 개화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69년에는 통정대부, 1873년에는 가선대부, 1875년에는 자헌대부, 1877년에는 숭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의 직함을 받았다.

오경석에 관한 위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화사상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낸 역사학자 신용하 교수가 집필한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1. William F. Mayers, 오경석초상,1872, 베이징 영국공사관

1872년 북경에서 찍은 초상사진이 있습니다. 1863년 이조판서였던 이의익(李宜翼)을 정사(正使)로 하는 삼절년공행(三節年貢行) 연행사절단이 북경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한국 사람이 찍힌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던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조선말 역관 출신의 개화사상가 오경석입니다. 아들이 한국서화 역사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의 저자인 오세창입니다. 그래서인지 비록 복사본일지라도 부친의 사진을 잘 건사하고 발문까지 붙여 가족의 유산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오경석의 사진은 명확한 기록에 따른 우리나라 최초의 초상사진으로 오랫동안 공인받아 왔습니다.

사진은 대지에 붙어 있고, 양쪽에는 오세창이 쓴 사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에는 先附君 四十二歲, 高宗九年 壬申 寫眞, 世昌記(선부군 사십이세, 고종구년 임신 사진, 세창기)라고 적었고 밑에 낙관을 찍었으며, 사진 왼쪽에는 北京 法國 公使館 參贊官 梅輝立 撮影, 不肖 在東京 複寫本(북경 법국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 촬영, 불초 재 동경 복사본)이라고 썼습니다. 돌아가신 부친이 42세 때인 고종 9년 임신년 즉 1872년에 찍은 사진으로 내용은 오세창 자신이 쓴 글이며, 북경의 프랑스(法國) 공사관 참찬관인 매휘립이 촬영했고 자신이 동경에 있을 때 복사한 복사본이라는 내용입니다. 오세창은 부친의 사진을 일본에 갈 때 다른 물건과 함께 가져갔으나 불행하게도 원래의 사진은 손실되었고, 다행히 일본 동경(東京)에서 복사한 복사본이 있어 남겼다고 증언했습니다.

오경석이 사진을 찍은 경위는 이렇습니다. 1872년 조선 조정에서는 이전 해인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의 전후 문제 처리와 관련하여 박규수(朴珪壽)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청나라에 파견했습니다. 오경석은 이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 사행을 했습니다. 8대에 걸쳐 20여명 이상의 역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인 오경석은 1853년 처음 역관으로 사행에 참여한 이래 1874년까지 20여 년 동안 무려 13번에 걸쳐 중국에 다녀온 베테랑 역관이었습니다. 정사인 박규수의 귀국 보고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들은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프러시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둘러싼 유럽의 정세, 중국내의 유럽과 미국인 동향에 대해 상세한 정보 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연히 수석역관인 오경석이 서양 공사관원들을 비롯한 외국인들과의 접촉을 도맡았을 것입니다. 매휘립(梅輝立)이란 주중 서양 공사관의 참찬관은 이런 과정에서 만났고, 그의 카메라 앞에서 사진도 찍게 되었습니다.

한국사진의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하는 과정에서 오세창과 같은 한국서화사의 거두가 친히 남긴 사진과 기록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대부분의 권위 있다고 하는 백과사전이나 오경석 연구서 등에서도 모두 ‘북경에서 프랑스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이 찍은 오경석의 사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활동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한 신용하 교수 또한 『한국근대사상사연구(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에서 이 기록을 그대로 원용하여 한국 최초의 사진으로 기술했습니다. 촬영 시기, 장소, 촬영자, 원본 유무, 복사본의 존재 등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사진에 관한 기술 항목이 이렇게 완전히 기록되어 있는 19세기 사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사진사 연구의 과정에서 남은 문제는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 나와 있는 매휘립이 과연 누구이고, 그가 찍은 다른 조선인의 사진은 더 없는지 여부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매휘립이 당시 북경의 법국 즉 프랑스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다는 오세창의 기술을 근거로 프랑스의 정부문서, 외교문서, 프랑스사진의 역사서, 외교사 등에 그런 인물이 있는지를 찾는 일은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에 소장된 <중국사회과학출판사>가 간행한 『近代來華 外國人 人名辭典』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근대 시기 중국에 왔던 외국인들의 명단과 면면을 조사 연구한 사전입니다. 여기에서 의외로 매휘립이란 인물의 항목을 발견했고, 내용은 중국명 매휘립은 본명이 Mayers, William Frederick(1831~1878)로 청국 주재 영국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프랑스 공사관의 참참관이 아니라 영국 외교관이었던 것입니다. 오세창에게 영정으로 사진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정보가 잘못 전해졌을 것입니다.

사전에 따르면, 매휘립은 호주 즉 오스트레일리아 출생으로 아버지가 영국의 호주총독 비서였던 인연으로 12세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귀화했고 공부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매스컴 분야에서 일하다가 1859년 중국에 왔으며, 1860년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에 특채되어 일한 외교관이었습니다. 영국의 중국 전문가로 『Introduction of Cotton into China, 1868』, 『Chinese Reader’s Manual, 1874』, 『The Chinese Government: A Manual of Chinese Titles, Categorically Arranged and Explained, 1878』, 『Treaties between the Empire of China and Foreign Powers,1877』 등 중국 관련 연구서를 많이 집필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 체류하던 대부분의 서양 외교관들은 사진술을 배우고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현지의 모습을 찍어 본국에 보고하던 일종의 스파이들이었습니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 대부분도 이들 외교관들이 찍어 본국에 보낸 기록물 덩어리에서 나옵니다. 매휘립의 사진 활동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고, 오경석의 사진은 매휘립의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매휘립은 1878년 타계할 때까지 영국에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서 머물렀습니다. 따라서 영국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외국인으로 지냈기에 중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다른 사진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