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스케치1-지리산의 봄 풍광과 꽃향기
05/2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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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년을 코앞에 둔 2015년부터 스케치를 병행하며 답사를 시도해 왔다. 그 시작은 조선 시대 한양 진경산수화의 작품과 그 현장을 찾아 월간지에 연재한 “서울이 아름답다”(월간미술, 2015. 5~2017. 3.)였다. 12회 연재를 묶어 『서울산수』(월간미술사. 2017.)를 발간했고, 연재하며 그린 사생화를 모아 생애 첫 개인전(노화랑, 2017. 7.)을 갖기도 했다. 그 뒤로, 2년 동안 쌓인 스케치북이 100권이 넘는다.
새해부터는 한 달에 20권가량씩 소화하는 것 같다. 이제 스케치가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모양이다. 이를 본 박주석(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교수께서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홈페이지에 소개하자고 제안해 왔다. 여건이 닿는 대로, 혹은 특정 지역 답사나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나 그림을 틈틈이 소개해보겠다.

지난 3월 21일부터 23일까지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학생들과 지리산 답사를 다녀왔다. 3월 21일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을 들러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을 거쳐 남원 만복사지를 둘러보았다. 마침 21일이 보름달 뜨는 날이어서 저녁 식사 후 광한루원 완월정(玩月亭)에서 멋진 보름달 구경을 기대했는데, 아침부터 짙은 비구름이 가시지 않았다. 이틀의 숙소는 구례 화엄사 입구였다. 22일에는 화엄사, 운조루, 연곡사, 쌍계사를 답사했고, 23일에는 남원지역 운봉 서천리 마을 돌장승, 황산대첩비, 실상사를 둘러보고 상경했다.
오랜만에 찾은 지리산의 풍경과 꽃들과 달 등을 스케치하며 봄을 만끽했다. 그동안 습관으로 찍어왔던 문화재를 뷰파인더에 담지 않으니 전체 여정이 가벼웠던 대신, 스케치가 즐겁긴 해도 큰 일감이었다.

3월 21일 답사 마무리에 남원의 서쪽 주생면 딸기농원에서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섬진강에 합류하는 요천강 안개와 미세먼지 속의 지는 해를 답사 첫 풍경 스케치로 담아 보았다.

3월 22일에 그린 화엄사 각황전 오른편을 지키는 고목 홍매는 만개하였고, 흑매라 불릴 정도로 검붉은 꽃잎 색이 여전하였다.
운조루 주변에는 매화와 산수유 꽃들이 지는 때에 안채의 흰 목련이 꽃봉우리를 내밀며 자태를 뽐내고 있어 옛 안채 주인을 연상하며 그렸다. 또 운조루에서 맞은편 오봉산을 보니, 섬진강 주변 보리밭의 연녹색 들이 봄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파노라마로 그 정경을 담고, 옆으로 긴 화면에 사생하였다.
오후에는 섬진강 따라 구례 연곡사와 하동 쌍계사를 둘러보는 일정이었고, 연곡사 경내의 신라 말 3층석탑을 그렸다. 지금처럼 연곡사가 복원되기 이전에는 피아골을 배경으로 홀로 흰 자태를 단아하게 뽐내었었다.
밤에 다시 화엄사로 향했다. 어제 못 본 음력 2월의 보름달 대신, 22일이 음력 열여섯 날인 기망(旣望)이니 그 둥근 달을 보러 8시경 희망자를 모아 화엄사 마당에 섰다. 근데 해발 일천미터 가량의 산 능선 너머로 달이 여간 떠오르지 않았다. 봄추위에 떨며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9시 범종 치는 소리를 감상했고,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의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찾았다. 밤 10시가 돼서야 강황전 맞은편 동산으로 달이 떠올랐으나, 맑았던 하늘에 옅은 구름이 몰려 완연한 월출을 감상하진 못했다. 각황전에 서니 신라의 거대한 석등 위로 달이 떠올랐다. 오른 달과 화엄사 경내 풍경을 낮은 조명 아래서나마 사진을 찍고 스케치했다.

3월 23일 새벽 숙소 문을 여니 어제 밤 화엄사에서 본 달이 구례 읍내 쪽으로 지고 있었다. 편하게 새벽 하늘을 보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했다.
실상사 람천 다리를 건너려니 동쪽 멀리 천황봉 자락이 위세로왔다. 이 풍광을 화면에 담았고, 개천 건너 1725년에 조성한 석장승과 느티나무 고목을 함께 담아 보았다. 지리산 북쪽 그늘이라선지 매화가 한편 지면서 한창이었다. 경내를 돌아 홍척국사비와 승탑으로 이동하니, 청매 꽃향기가 진동해왔다. 올해 마지막 매화 그림이려니 하며 답사 끝 그림으로 청매도를 그려보았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