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2 : 강을 건넌다는 것 – 여성의 욕망의 출발점: 전경린의 「강변마을」
03/31/2019
/ 신수정

“조심해야 해.”

외삼촌이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외삼촌은 나를 안고 그의 친구들은 오빠를 목말 태우고 걸어 들어갔다. 강물이 가슴까지 올라왔을 때 두려움이 몰려왔다. 외삼촌은 꽉 끌어안은 나를 뒤로 돌려 목말을 태웠다. 그곳에서 보는 강물은 끝없이 길고 막막하게 넓고 물결은 무겁고 흐름은 빨랐다. 물결이 어깨까지 올라왔을 때 외삼촌의 몸이 균형을 잃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나를 목에서 내려 등에 태우고 수영을 시작했다. 나는 외삼촌의 목을 두 팔로 고리처럼 걸어 안았다. 외삼촌은 온몸을 힘차게 저었지만 아래로 마구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머리 밑에 한기가 들며 등줄기를 따라 진저리가 지나갔다. 외삼촌은 아래로 흘러가며 헤엄을 쳐 강을 비스듬히 잘라 건넜다. 강을 건너 다른 편 강변에 앉았을 때 오빠도 나도 침묵에 빠졌다. 공포에 질린 것인지 감동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몸 안에 강물이 가득 밀려들어온 것만 같았고 뭔가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같이 허전하기도 했다.

다시 도강을 할 때는 몸을 미는 크고 높고 살찐 물살도 편안했다. 물살은 수없이 많은 부드러운 몸뚱이들처럼 나를 포옹하고 팔을 풀고 흘러내려갔다. 외삼촌은 팔로 내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허벅지의 부드러운 살을 안고 있었다. 강물은 외삼촌의 허리까지 닿았다가 가슴까지 닿았다. 나는 두 팔로 외삼촌의 목을 꼭 안았다. 외삼촌의 가슴에서 산이 땀 흘릴 때 날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외삼촌의 왼손이 허벅지를 지나 천천히 가운데로 다가왔다. 점점 더 가운데로……나는 얼굴을 들고 외삼촌의 눈을 바라보았다. 외삼촌은 표정의 변화 없이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흑보랏빛 동공이 물처럼 흔들렸다. 처음으로 동공이 액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공 속에 여름 아침의 이슬이 고여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 외삼촌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팬티 아래까지 다가온 외삼촌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뒤로 돌려 등에 올렸다. 나는 몸을 펴고 엎드렸다. 우리는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지만 두 팔은 고리처럼 외삼촌의 목에 걸려 있었다. (전경린, 「강변마을」, 『천사는 여기 머문다』, 문학동네, 2014, 83~84쪽.)

전경린의 단편「강변마을」의 화자인 열한 살 소녀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시끄럽고 번잡한 집을 떠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촌 외갓집’으로 가게 된다. 당연히 ‘사촌 외갓집’이라는 조어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이 집은 소도시 시골에서 ‘수완가’라는 평을 듣고 있던 아버지가 엄마 몰래 만나온 내연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을 ‘외갓집’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부 갈등과 남편의 여자 문제로 늘 얼굴을 찌푸리고 히스테리를 부리던 ‘엄마’가 “화와 슬픔을 동시에 억누르며 의지가 깃든 초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아이들을 ‘그 여자네 집’으로 보내 자신의 위세를 환기시키고자 할 때, 그 집은 아이들에 의해 ‘사촌 외갓집’으로 불리게 된다.

이 외갓집으로 가는 과정은 멀고도 험하다. ‘나’는 장시간 멀미를 할 것 같은 버스를 타고 또 뙤약볕 아래 오 리를 더 걸어 들어가 마침내 외갓집이 있는 ‘강변마을’에 당도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그 모든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무언가가 있다. “선생님도, 엄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동생도, 어느 누구도” 베풀어주지 못한 사랑과 자애로 소녀를 환대하는 ‘외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자신과 처음으로 길게 눈을 맞추어주고 낯선 화장실에 불편해하는 ‘나’의 뒤를 닦아주기까지 한다. 소녀는 그곳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자기의 몸을 마구 찔러대던 ‘가시’가 모두 뽑혀나가는 듯한 안도감을 맛본다. 모든 것이 크고 둥글고 퉁퉁한 외할머니의 세계. 그러나 이 둥근 부드러움의 세계에도 ‘금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외할머니는 다른 모든 것에 관대하지만 ‘강’에 들어가는 것만은 끝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외할머니에 따르면 강은 일순간 몸집을 키워 땅콩밭과 수박밭, 그리고 포도밭을 삼켜버리고 마을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못된 ‘용’과 같은 존재다. 때로 이 용은 낯선 아이를 집어삼키기까지 한다. 외할머니가 소녀에게 절대 강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금지는 더욱 강력한 욕망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한 번도 ‘강’을 보지 못한 시골 소녀는 강에 가기를 욕망한다. 자신의 욕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다 못해 울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외삼촌’이 등장한 것이다. 군에서 휴가를 나온 외삼촌은 소녀를 강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등에 업고 강을 건넌다. 그런데 위의 지문에서도 나타나듯 소녀와 외삼촌의 ‘도강’은 지독한 에로스의 향유와 구별되지 않는다. 소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외삼촌의 목을 꽉 걸어 안고, 등에 올라탄 채, 급류에 몸을 맡긴다. 하나가 된 그들의 몸은 물결을 따라 아래로 떠내려갔다가 다시 솟구쳐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건너편 강변에서 ‘다시 도강을 할 때’ 나와 외삼촌의 행위는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외삼촌의 손은 점점 소녀의 중심을 향하고 나는 외삼촌의 눈을 바라본다. 외삼촌도 나를 마주 본다. 나에게 외삼촌의 “짙은 눈썹 아래 흑보랏빛 동공이 물처럼 흔들리는” 순간이 포착된다. 소녀는 그 동공 속에 “여름 아침의 이슬”이 고여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 순간 외삼촌은 나의 중심을 향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뒤로 돌려 등에 업는다. 나는 “정신을 잃을 것”같은 혼미함 속에서도 외삼촌의 목을 잡고 있던 팔을 풀지 않는다.

강을 건넌다는 행위, 즉 도강을 이토록 섹슈얼하게 묘사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전경린은 열 살 소녀가 외삼촌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는 행위를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어 급류에 몸을 맡기는 장면으로 치환하고 있다. 비록 이때의 외삼촌이 진짜 외삼촌이 아니라 아버지의 애인의 동생이라는 기묘한 관계의 산물로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급류를 가로질러 강의 저편으로 소녀를 인도하는 사람이 외삼촌이라는 사실은 위반의 상상력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여기에는 에로티시즘이 요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금지된 행위, 즉 도강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근친상간의 금기에 대한 위반. 게다가 소녀는 강을 건너 도달한 저편 강변에서 느닷없는 ‘침묵’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에로스의 충족 이후 주체를 엄습하는 ‘허전한 슬픔’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강을 건너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나토스를 동반하는 에로스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굳이 우리의 옛 노래 <공무도하가>를 들지 않더라도 ‘도강’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욕망의 추구를 상기시킨다. ‘그 강을 건너지 말라’는 아내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백수광부’는 기어이 강을 건너고야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남편을 잃은 아내는 비통하게 절규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파엘전파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어>(1852)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자신의 연인이었음을 알게 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허구의 이야기는 수세기에 걸쳐 많은 화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녀를 그린 그림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아마도 이 여성이 구현하는 비극성이 화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제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밀레이의 그림은 단지 비극성의 재현에만 치중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없지 않다. 밀레이는 오필리어를 단순한 희생양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에서 밀레이의 오필리어 역시 운명의 시련을 감당하지 못한 비극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밀레이는 죽어가는 오필리어에게 황홀한 관능을 선사한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오필리어는 묘한 흥분과 희열을 상기시키는 미소를 띠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에로스의 향유와 구분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이 그림에서 죽음을 무릅쓰는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90년대 새롭게 등장한 전경린은 이제까지 이런 종류의 관능의 대표주자로 분류되어온 편이다. 전경린의 소설이 대변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추구는 대부분 ‘도강’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여성 인물의 자발적 열정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는 불 켜진 아파트 단지를 등지고 여행가방을 든 채 염소를 끌며 자신만의 숲을 향해 떠나는 한 여자의 ‘일탈 욕망’(「염소를 모는 여자」)으로 대변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의무만 남은 가족관계와 무한히 반복되는 노동에 지쳐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정거장에 덩그러니 서 있기도 하는 여자의 ‘무기력한 우울’(「밤의 정거장」)로 나타나기도 하는 이 열정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를 동반하는 관능을 추구해왔다. 「강변마을」의 소녀 역시 마찬가지다. 외할머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에 가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 소녀를 열정의 주체라고 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강에 가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때로 그것이 사회적 지탄이나 친숙한 것으로부터의 추방을 가져오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자 할 것이다. 방학이 끝나고 ‘강변마을’에서 집으로 귀환한 소녀가 엄마의 처벌과 금지에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다시 ‘강변마을’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추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의 삶에 불어 닥친 ‘저주의 몫’은 이제 어느 누구도 풀어줄 수 없다. 소녀는 단 한 번의 ‘도강’으로 어느새 “땅의 밋밋한 바닥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86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강변마을」은 이 열정의 매혹만큼이나 그것의 폭력적인 힘을 역설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한때 ‘도강’의 전율을 선사했던 그 강이 얼마나 변화무쌍한 변덕의 주재자인지를 거듭 강조한다. 외삼촌과 함께했던 ‘강’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그가 귀대한 이후 외할머니와 함께 다시 강을 찾게 된 소녀는 그 강의 어디에서도 자신이 알고 있던 강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다. 외할머니와 함께 찾은 강은 외삼촌에게 매달려 몸을 떨던 그 강이 아니다. 환희와 공포가 공존했던 관능의 강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곧이어 태풍과 함께 사흘 동안 ‘폭우’가 몰아쳐온다. 폭우는 안식과 포용의 땅이었던 ‘강변마을’을 악취와 파리떼가 난무하는 ‘오물의 땅’으로 만들어버린다. 최고의 에로티시즘을 선사했던 강은 어느 순간 최악의 악취와 오물을 퍼붓는 괴물로 돌변한다. 「강변마을」은 이 대목에서 조금의 연민도 발휘하지 않는다. 오로지 잔인한 현실원칙을 지팡이 삼아 폭우와 함께 ‘강변마을’에 찾아온 열정의 대가를 재현하는 데 치중할 뿐이다. 아마 이 재현의 최고 정점은 ‘사촌 외갓집’이라는 요령부득의 언어를 파기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는 마침내 ‘사촌 외갓집’이 무엇을 지칭하는 말인 지 그 말의 현실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소녀가 ‘사촌 외갓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엄마가 등짝을 내리치며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훈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처벌을 통해 소녀는 그 말이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94쪽) 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알게 된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아끼지 않던 ‘외할머니’는 어떤 혈연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타인’에 불과하며 그 ‘외할머니’의 딸인 ‘단발머리 소녀’는 아버지와 통정하여 이복동생을 세상에 내보낸 더러운 ‘내연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강변마을」의 소녀는 이 참혹한 비밀을 깨우치며 어른으로의 ‘입사’에 성공한다. 어른으로 가는 ‘도강’의 과정은 ‘죽음’과 ‘처벌’을 동반한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에의 공포와 처벌에의 환멸 사이에 거처한다. 여성의 경우, 이 거처는 더욱 삭막하게 진실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강을 건넌다는 것, 무엇보다도 여성이 강을 건넌다는 것은 항상 그로 인한 죽음과 처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강변마을」은 이 사실을 참혹하게 환기시킨다. 강을 건너는 순간, 그녀는 이 세계 어디에서도 안락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고자 하는 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강변마을을 기웃거린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지워지고 부인되었던 여성의 욕망이라는 모호한 대상이 실재하기 시작하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강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기제가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욕망은 그렇게 출발한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