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두 번째)
01/24/2019
/ 이태호

도2. 윤위그림,〈구택규 흉상〉, 1750년대 전반, 비단에 수묵담채, 59.1×42.2cm

조선 시대 초상화 하면 세세하고 정밀한 묘사와 피부병을 검토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로, 그 리얼리티를 자랑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초상화도 얼굴 피부의 약점을 지워 그린 사례가 있다. 화원 장경주와 문인화가 윤위가 각각 그린, 관복 차림의 구택규 초상 두 점이 그 사례이다. 최근 발굴된 두 점 가운데 화원의 초상화가 뽀샵 처리되어 흥미로우며, 윤위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자여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태호, 「최근 발굴된 영조시절의 문신 구택규(具宅奎) 초상화 두 점」-문인화가 윤위가 그린 흉상과 화원 장경주가 그린 반신상, 『인문과학연구논총』 36-1,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봄, 210~238쪽) 두 화가가 그린 구택규 초상을 “뽀샵 처리한 화원 장경주의 <구택규 반신상>”과 “있는 그대로 그린 문인화가 윤위의 <구택규 흉상>”, 두 번으로 나누어 논문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겠다.

(2) 문인화가 윤위가 있는 그대로 그린 <구택규 흉상>

구윤옥의 화기에 밝혀진 화가 윤위(2)

앞서 소개한 <구택규 반신상>과 닮은 관복차림의 문신 흉상 한 점이 2012년 가을 프랑스에서 들여와 국내 옥션에 출품된 적이 있다. 그때는 유찰되었고,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이 구입했다. 고운 비단에 59.1×42.2cm 크기의 흉상그림과 113.5×57.5cm 크기의 족자로 꾸민, 초상화를 제작했을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림에는 주인공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초상화의 아랫단 7.9×42.2cm 족자공간에 쓰여 있는 단정한 예서체의 글에서 그 인물이 확인된다. 이 화기(畵記)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此本幼士 尹愇所摹也 尹氏嘗於造次望見先君子 歸而摸以藏之 庚辰始聞于人 謹求而粧 並前二本 而敬安之 是摹不知在何年 而盖中年以後之眞也 尹氏文士且無雅素 雖執重幣而求之 猶未得焉 其自摹而又能致精力如是 何其不偶然也 尹氏已亡 莫可叩而詳也 神采之內 發庶幾乎七分 則前後摸之者所難也 而尹氏能焉 亦何工也 豈其神思 專而發之 若有助歟 嗚乎 手澤(之)所存 猶不忍讀其書 矧玆左右瞻昻 孺子之感 爲何如也 嗟後昆寓慕之所 亦不在斯與
庚辰秒秋 子 允鈺泣血謹識

이 초상은 선비 윤위(尹愇)가 모사하였다. 윤씨는 일찍이 내 아버지를 잠깐 바라 본 뒤 돌아와서 초상을 그렸고 수장였다. 경진년(1760)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고 삼가 구해서 장황했고, 앞서 그린 두 초상화와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 모사본은 어느 해에 그렸는지 모르겠으나, 대개 중년 이후의 초상이다. 윤씨는 문인선비로서 평소의 교분이 없었기에 큰 선물을 주고 구하려 해도 얻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 스스로 모사하며 또 힘써 이같이 그렸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윤씨는 이미 세상을 뜨셨으니 물어 볼 수 없다. 안에서 뿜어 나오는 정신이 거의 칠분(70프로)에 가까웁다. 그 전후로 닮게 모사하기란 어려운 일인즉, 윤씨는 능히 이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공교로운가. 어찌 그가 정신을 하나로 모아 드러내었는지, 마치 누군가의 조력이 있었던 것만 같다. 오호라, 손때가 남아 있을 경우 차마 그 책을 읽지 못한다고 한다. 하물며 좌우에서 우러러보는데 어린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아, 후손된 사람의 사모하는 바가 바로 이 초상화에 있지 않겠는가.

경진년(1760) 초가을(7월)에 아들 윤옥이 피눈물을 쏟으며 삼가 쓰다.

 

이 글은 병조판서를 지낸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이 ‘1760년 7월(음력) 피눈물을 쏟으며 썼다’고 한다. 구윤옥이 떠올린 ‘중년 이후의 아버지’가 구택규(具宅奎, 1693〜1754)이다. 여기서 초상화를 정말 공교롭게 그렸다고 상찬한 화가는 범재(泛齋) 윤위(尹愇, 1725〜56)이다.

윤위는 윤덕현(尹德顯, 1705〜72)의 장남이다. 윤덕현은 윤두서의 여덟째 아들로 서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윤두서는 1711년 초가을 5언시와 함께 간결한 수묵필치의〈우여산수도(雨餘山水圖)〉를 어린나이의 윤덕현에게 그려준 적이 있다. 아버지의 감수성을 계승한 듯 윤위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다. 거장으로 장성하리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32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상당한 시문을 모은 󰡔범재집(泛齋集)󰡕이 전한다.

윤위의 재능은 아들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 1752〜1821)으로 이어졌다. 윤규범은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두터운 교분을 쌓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윤규범이 요청한 󰡔범재집󰡕의 서문에서, 정약용은 절친인 윤규범 못지않게 윤위의 문학세계를 높이 평가하였다. 윤위와 윤규범 부자를 서성(書聖) 왕휘지·왕헌지 부자에 빗대서 칭송했을 정도이다. 윤위가 그린 초상화의 출현으로, 윤두서 집안의 삼대에 걸쳐 배출된 문인화가는 윤두서-윤덕희-윤용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윤위는 할아버지 윤두서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뒤에 태어났으니 직접 그림을 배울 기회는 없었다. 허나 집안에 소장된〈윤두서 자화상〉을 비롯하여 그 유묵들 사이에서 필력을 익혔을 만하다. 윤두서의 장남 연옹(蓮翁) 윤덕희(尹德熙, 1685∼1776)는 문인화가로 유명했고, 영조 24년(1748) 장경주가 숙종 어진을 이모할 때 감동으로 참여했다. 허나 실제 윤덕희가 1735년에 모사한〈이상의(李尙毅) 초상〉 흉상을 보면, 윤두서 뿐만이 아니라 윤위의〈구택규 흉상〉에도 못 미친다. 청고(靑皐) 윤용(尹愹, 1708〜1740)의 경우는 초상화를 남긴 사례가 없다.〈윤두서 자화상〉의 탁월한 소묘력 유전인자가 그 손자 윤위에게 내려진 것 같다.

 

윤위와 장경주의 초상화법 비교

윤위가 그린 <구택규 흉상>은 50대 사대부 문관의 고고한 품위를 서늘하게 드러낸 명품이다. 구불구불 세심한 선묘의 희끗희끗해진 수염이나 붉은색 입술, 살짝 음영을 넣은 기법은 비록 장경주 본을 카피한 것이지만, <윤두서 자화상>에서도 배웠을 법하다. 약간 황갈색조의 어둑한 얼굴에 이마와 눈가 주름, 코와 안면의 건버섯 같은 피부병 묘사까지 사실감이 두드러진 감명은 더욱 그러하다. 할아버지를 계승한 윤위의 초상화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윤위의〈구택규 흉상〉에 대하여 구윤옥은 화기에 인물의 ‘70프로’를 담았다고 상찬하며 ‘그 전후로 닮게 모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언급해 놓아 흥미롭다. 역시 얼굴을 흡사하게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당시 화가나 주문자 모두 비슷하게 인식하였다.

윤위의〈구택규 흉상〉은 오사모에 분홍색 단령포 차림으로, 화원 장경주의 1746년 작〈구택규 반신상〉과 너무도 흡사하다. 윤위의〈구택규 흉상〉은 구윤옥이 발문에 밝힌 대로 ‘잠깐 인물을 바라 본 뒤 그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윤위의 그림을 구해서 앞선 두 초상화와 함께 모셨다’고 밝힌 점이 주목된다. 그 ‘二本’은 윤위가 참작했던 초상화로 여겨지며, 앞에서 소개한〈구택규 반신상〉외에 또 다른 장경주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화기에 조현명이 찬문을 쓴 장경주의〈구택규 반신상〉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장경주는 구택규의 초상화를 최소한 3점 이상 그린 셈이다.

윤위는 장경주의 구택규 초상화 중 그 한 본을 보고〈구택규 흉상〉을 모사했을, 제작 시기는 1750년대 전반 윤위의 나이 20대 후반쯤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두 초상화가 서로 닮았으면서도, 표현화법의 차이가 눈에 띈다. 화원 장경주의 초상화법은 훈련된 형식미의 탄탄함을 보여주며, 윤위의 초상화법은 문인화가답게 꾸밈없는 격조가 서려 있다. 이는 홍색 단령포 관복의 옷주름 표현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탄력 있는 여러 가닥 옷주름의 장경주 본에 비하여, 윤위 본의 의습에서는 서너 가닥으로 정리하며 어깨선을 수정한 흔적이 또렷하다. 특히 의상 표현의 조심스런 붓자욱은 문인화가 윤위의 담백한 감성을 물씬 풍긴다.

문인화가 윤위와 화원 장경주, 두 화가가 구사한 초상화법의 차이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겠다.

먼저 배채법(背彩法)의 유무이다. 장경주의〈구택규 반신상〉은 조선시대 화원의 배채법 활용이 뚜렷하여 분홍빛 얼굴과 관복, 그리고 검은색 관모 표현이 짙고 안정감을 준다. 이에 비하여 윤위의〈구택규 흉상〉에는 얼굴이나 관모와 관복 표현의 투명감이 감돈다. 그림을 확대해 보면 고운 비단의 뒷면에 물감층이 없어 배채법을 쓰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특히 윤위 본의 피부병변을 드러낸 담갈색조 안색도 배채법을 쓰지 않은 탓이다. 이는 장경주 본의 화사하고 밝은 연분홍 피부감과 잘 비교된다. 이러한 문인화가의 초상화에서 배채법을 쓰지 않은 표현법은 1782년 작〈강세황 자화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음 53세와 50대 후반의 노인 구택규를 대상으로 삼은 두 초상화는 얼굴 표현에 큰 차이를 보인다. 53세 모습의 장경주 본은 천연두 흔적이나 노인의 건버섯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말로 뽀샵처리를 해놓았다. 약간 어두운 얼굴에 코와 눈 주변의 천연두 흔적과 왼쪽 뺨의 건버섯 표현이 뚜렷한, 윤위 본과 비교할 때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아마도 구택규가 장경주에게 얼굴의 약점을 수정하도록 요구했고, 장경주가 그 요청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윤위는〈구택규 흉상〉에서 장경주 본을 충실하게 모사하였다. 거의 화원급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구택규의 얼굴에서 확인한대로 피부병변을 드러내었다. 문인화가의 진솔한 묘사방식을 잘 보여주며, 이는 할아버지 윤두서의 사실정신과 묘사력의 탁월함을 계승한 결과일 게다.

마치며

구택규 초상화 두 점을 통하여 조선후기 화원과 문인화가의 초상화법을 살펴보았다. 역시 얼굴 이미지와 화풍이 비슷하면서도 배채법(背彩法) 같은 화원 화가의 형식미와 문인화가의 담담한 사실표현에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피부병변의 표현 유무를 확인하게 된 점은 괄목할 만하다. 흔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그 치밀한 사실화법에 놀라고, 안면의 피부병 같은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는 사실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런데 장경주의〈구택규 반신상〉은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수정하였음을 보여준다. 도리어 윤위의 소품〈구택규 흉상〉에 약간 어눌한 선묘와 함께 진솔한 사실미가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이처럼 문인화가와 화원이 동시에 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린 사례로는 조영복과 강세황 초상을 들 수 있겠다. <조영복(趙榮福) 초상>은 1724년 동생인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그린 평상복의 좌상과 1725년 화원 진재해가 그린 관복전신상이 전한다. 약간 일그러진 표정은 조영복의 영춘(永春) 유배시절을 적절히 드러낸 이미지이다. 복장과 자세는 크게 다르지만, 얼굴 모습이 한 사람 솜씨처럼 닮은꼴이다. 구택규 초상화와 반대로 문인화가 조영석 본을 보고 화원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것이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초상화의 경우에는, 1782년 작〈강세황 자화상〉과 이명기가 1783년에 그린〈강세황 71세 초상〉이 화법의 차이를 크게 보여준다.〈강세황 자화상〉이 얼굴묘사나 의습의 선묘에서 약간 직선적인 느낌을 주는데 비하여, 이명기의 솜씨에는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서양화식 입체화법이 선명하다. 이명기의〈강세황 71세 초상〉은 그 치밀한 묘사로 노인 관료상을 잘 살릴 반면에,〈강세황 자화상〉은 문인으로서 자신의 심상을 적절히 드러낸 편이다.

조선후기에는 윤두서에 이어 윤위, 조영석, 강세황 등 묘사기량이 출중한 문인화가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의 표현영역이 화원들의 초상화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택규 초상화를 비롯한 이들 문인화가와 화원이 동일 인물을 그린 초상화는 조선시대 어진을 제작할 경우, 도화서 화원의 솜씨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인화가를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했던 이유를 수긍케 한다. 훈련된 화원의 꾸밈 기량과 문인화가의 진솔한 품격을 조화시키려는 적절한 의도이자 안배인 셈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