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첫 번째)
01/08/2019
/ 이태호

도1. 장경주그림,〈구택규 반신상〉, 1746년, 비단에 수묵담채, 86.2×46.2cm,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 시대 초상화 하면 세세하고 정밀한 묘사와 피부병을 검토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로, 그 리얼리티를 자랑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초상화도 얼굴 피부의 약점을 지워 그린 사례가 있다. 화원 장경주와 문인화가 윤위가 각각 그린, 관복 차림의 구택규 초상 두 점이 그 사례이다. 최근 발굴된 두 점 가운데 화원의 초상화가 뽀샵 처리되어 흥미로우며, 윤위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자여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태호, 「최근 발굴된 영조시절의 문신 구택규(具宅奎) 초상화 두 점」-문인화가 윤위가 그린 흉상과 화원 장경주가 그린 반신상, 『인문과학연구논총』 36-1,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봄, 210~238쪽) 두 화가가 그린 구택규 초상을 “뽀샵 처리한 화원 장경주의 <구택규 반신상>”과 “있는 그대로 그린 문인화가 윤위의 <구택규 흉상>”, 두 번으로 나누어 논문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겠다.

 

(1) 화원 장경주가 뽀샵 처리해 그린 <구택규 반신상>

구택규(具宅奎, 1693〜1754)는 영조시절에 고위직 관료로 활동했다. 숙종(肅宗) 40년(1714) 문과(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 1735)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외직으로 진주목사, 동래부사, 회양부사, 영변부사(1745) 등을 역임했고, 형조참의, 도승지, 의금부사, 공조참판, 병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1753)에 올랐다. 법제관련 전문관료로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속대전(續大典)󰡕 편찬(1744〜46)을 주관했으며, 법의학서인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중간(重刊)도 주도하였다. 또 공정한 판단력을 높이 샀던 듯 관동과 영동, 강원도 지역에서 지금의 감사격인 심리사(審理使)를 맡아 지역의 현안과 필요한 정책 대안들을 내놓았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재(存齋) 혹은 만포당(晩圃堂)이다.

문인관료상으로, 구택규 초상화 두 점이 최근 세상에 알려져 주목을 끌었다. 법률에 정통했던 문신의 깐깐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그림들이다. 한 점은 문인화가 윤위(尹愇, 1725〜1756)가 1750년대 전반에 구택규의 50대 후반을 그린 흉상이다. 윤위는 조선후기 거장으로 꼽히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손자이다. 이 초상화는 2012년 국내 옥션에 출품되면서 처음 알려졌고,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윤두서일가 관련 새로운 회화자료로 소개한 바 있다. 다른 한 점은 당대 최고로 칭송되던 어진화가 장경주(張景周: 1710〜1775년 이후)가 53세의 구택규를 1746년에 그린 반신상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으로 2008년 초상화의 찬문(贊文)이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사모관복 차림의 관료 초상화 두 점은 한 사람의 솜씨라고 생각될 정도로 유사한 편이다. 제작 시기로 미루어 보면, 윤위의 <구택규 흉상>이 장경주의 <구택규 반신상>을 참작하여 모사했으리라 추정된다. 할아버지 윤두서를 잘 공부한 듯, 문인화가 윤위의 묘사기량이 상당한 편이다. 문인화가로서 윤위에 대하여는 과문하지만, <구택규 흉상>은 윤위의 회화 기량이 <윤두서 자화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두 작품은 장인적 작업 공정을 거치는 초상화가 더 이상 화원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며, 이는 조선후기 회화의 새 양상이기도 하다. 또 <구택규 반신상>은 어진화가(御眞畫家) 장경주의 뛰어난 묘사력을 자랑할 만한 걸작이다.

 

어진화가 장경주의 화력과 행적

장경주는 할아버지 장자욱(張子旭), 아버지 장득만(張得萬, 1684〜1764)에 이어 영조시절 어진화가로 활약했다. 삼대가 어진화가였던 화원의 명문가 인동 장씨(仁同 張氏)이고, 자는 예보(禮甫)이다. 영조 20년(1744)에 선배인 김두량(金斗樑, 1696〜1763)과 조창희(趙昌禧)를 동참화사(同參畵師)로 밀어내고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영조의 어진을 제작했다. 이때 장경주의 핍진하는 표현력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으며, 정3품 무관직 충장위장(忠壯衛將)에 올랐다. 장경주는 영조 24년(1748)에도 숙종 어진모사의 주관화사였다. 이때는 아버지 장득만 외 정홍래(鄭弘來, 1720〜?), 김희성(金喜誠, ?〜1763년 이후), 진응회(秦應會, 1705〜?) 등이 동참화사였고, 감동(監董)으로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과 윤덕희(尹德熙, 1685〜1776)가 참여했다. 장경주가 아버지나 선배들을 제치고 이처럼 주관화사로 발탁된 연유는 초상화의 핵심인 얼굴을 꼭 닮게 그리는 묘사기량의 탁월함 때문일게다. 당대의 문인인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은 장경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장경주는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지사(知事)에 이르렀다. 어용(御容)을 모사할 때면 주필(主管畵師)을 맡아 했는데, 초상화 그리는 법이 정세했기 때문이다. 영조 때의 문관 · 무관 · 종친과 벼슬이 높은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맨 처음 작은 유지(油紙) 조각에 얼굴을 모사해 그린 것을 모두 하나의 책으로 모아 그의 집안에 다 두었다고 한다.…

이 증언에서 관심을 끄는 또 한 대목은 유지초본의 관료흉상을 보관했다는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해동진신초상첩(海東縉紳肖像帖)》이나《명현화상첩(名賢畵像帖)》흉상들이 장경주의 초본으로 추정되기에 그러하다. 1750〜70년 경에 제작된《해동진신초상첩》에는 장경주가 그렸던 관복초상화〈이주진(李周鎭, 1692∼1749) 초상〉의 흉상초본이 합장되어 있고, 동시기나 약간 후대의《명현화상첩》에는 구택규의 아들인〈구윤명(具允明, 1711∼1797) 흉상〉 초본이 포함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얼굴이 갸름하게 긴 편으로 부자간에 닮은 이미지이다. 두 화첩의 초본들은 여기서 살펴보는 1746〜50년 경의 구택규 초상화들에 비해 입체감이 살짝 짙어진 편이다. 이들에 대하여는 별도의 심도 있는 탐구가 필요하겠다.

󰡔승정원일기󰡕를 훑어보면 장경주는 어진제작 후 평안도 천수첨사(天水僉使, 1745), 철산의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 1748), 진보의 우현첨사(牛峴僉使, 1751)를 지냈다.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까지 올랐으며, 경상도 사천현감(泗川縣監, 1757)을 역임했다. 기록에 전하는 장경주의 마지막 벼슬은 영조 51년(1775) 훈련판관(訓鍊判官)이었다. 이들 벼슬은 최고의 어진화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장경주는 평안도 방어진지의 지휘관을 두루 맡았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화원 출신 장경주를 주요 지역첨사로 발령낸 것은 아마도 국방과 관련하여 관방지도의 제작을 맡기려는 의도도 깔려 있는 듯하다. 특히 현존하는 병풍이나 편화의 영변·묘향산지도와 철옹성도 등과 같은 양질의 지방 군현지도는 장경주 같은 화원의 지방관 근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 사례는 장경주의 능력을 확인하기에 마땅치 않았다. 1744년에 그린 <윤증(尹拯, 1629〜1714) 초상>이 있으나 윤증 사후의 모사 그림이고, 1744〜5년에 제작한《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의 초상화들은 여러 화원이 참여했기에 장경주의 개성과 기량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어려웁다. 이들에 비해 여기에 소개하는 <구택규 반신상>은 어진제작의 주관화사 실력을 한껏 드러낸 초상화로 꼽을 만하다.

 

영변에서 그린 <구택규 반신상>의 화풍 (1)

<구택규 반신상>은 86.2×46.2cm 크기의 고운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린 초상화이다. 오사모를 쓰고 분홍빛 관복에 학정금대를 착용한 2품직 관료상이다. 약간 오른쪽을 향한 자세를 비롯하여 18세기 중엽 영조 시절 초상화법의 격조가 여실하다. 검은 오사모의 치밀한 실짜임 무늬 묘사, 깨끗한 안면의 분홍빛, 얼굴 주름에 따른 옅은 음영, 촘촘한 세선의 눈썹과 수염 묘사 등 그야말로 선선한 감각의 사대부상 그대로이다. 음영진 두 눈의 안구 서클과 잔주름, 그 안의 평면적인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희게 변하는 수염으로 살짝 가려진 붉은 입술에는 고집스런 근엄함이 넘친다. 영조가 여러 지방의 심리사로 구택규를 선택했던 이유를 짐작케 하는 표정이다. 코 밑과 입술 아래와 턱 밑의 수염은 철선묘로 표현할 만큼 직모인데 비해, 좌우 수염은 곱슬곱슬하다.

소매 안의 두 손을 배에 모으고 공수자세를 취한 상반신 초상화이다. 푸른색 띠에 금색 버클이 붉은색 학머리 무늬와 조화된 학정금대(鶴頂金帶)는 오사모와 함께 분홍빛 관복에 엑센트가 되어 초상화의 단순하기 쉬운 화면구성을 조화롭게 한다. 양 팔과 소매의 리듬감 있는 옷 주름 표현이 깔끔하다. 17세기 초상화에 구사된 두 세 가닥의 형식적인 단순 표현에서 여러 가닥의 옷 주름을 실감나게 묘사하려는 변화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 화원의 배채법(背彩法)의 활용으로, 분홍빛 감도는 깨끗한 얼굴과 관복, 그리고 검은색 관모 표현이 안정감을 준다.

화면의 오른편 상단에 ‘晩圃堂五十四歲眞’이라는 제목이 단정한 행서체로 쓰여 있다. 그 아래에 같은 서체의 ‘時丙寅仲秋 天水僉使 張敬周寫 于寧邊淸風閣’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병인(丙寅, 1746) 가을 8월에 천수첨사(天水僉使) 장경주(張敬周)가 영변(寧邊) 청풍각(淸風閣)에서 그리다.”라는 내용이다. 이는 화원 출신들이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현직 수행 외에도 지역 내 고관들의 요구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던 관행의 기록인 셈이다. 초상화를 그렸을 당시 화면에 ‘장경주’라는 화가 이름을 밝힌 점은 화원출신 현직관료에 대한 구택규의 각별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두 사람이 영변에서 만난 행적을 뒤지니 다음과 같다.

장경주는 1744년 말 영조 어진을 제작한 직후 충장위장을 지내다, 영조 21년(1745) 7월 무관직 종3품 천수첨절제사로 발령을 받는다. 평안도 북부에서 청천강을 끼고 묘향산과 약산의 철옹성을 이룬, 영변부에 딸린 군사요충지이다. 천수(天水)는 묘향산 북쪽에 인접해 있다. 영조 22년(1746) 3월 첨사 근무평가에서 하위의 ‘居二’를 받아 화를 당할 뻔했으나 모면한 일도 있었다. 그해 8월 장경주가 영변부사인 구택규의 요청에 따라 영변관아의 청풍각에서 <구택규 반신상>을 그리게 되었다. 혹여 곤장 같은 체벌을 면하는데 구택규의 도움이 있어, 초상화는 그 보답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1745년경 평안도관찰사 이종성(李宗城, 1692∼1759)도 장경주에게 초상화를 그려받은 일이 있었다. 소론계인 이종성이 영조 21년(1745)부터 이듬해 윤 3월 18일 까지 평안감사를 역임했으니, 장경주는 그 사이에 흉상을 그렸을 법하다. 이 역시 장경주의 처벌에 대한 무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영조 24년(1748) 숙종 어진의 모사에 주관화사로 발탁될 때까지, 장경주는 천수첨사로 근무했다.

구택규는 영조 21년(1745) 우승지를 지내며 관동심리사와 영동심리사를 역임했다. 같은 해 7월 24일 형조참의에서 영변부사로 발령을 받았고, 8월 15일 하직하고 임지로 떠났다. 영조 22년(1746) 4월 11일 󰡔속대전󰡕의 교정 당상으로 임명받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는 정3품 영변부사 시절의 <구택규 반신상> 관복에 2품직에 해당되는 학정금대(鶴頂金帶)를 그려 넣게 된 근거이다. 구택규는 영조 22년(1746) 말 지의금부도사(知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 한양에 입성했고, 그 다음해 2월에 병조참판에 올랐다.

 

초상화에 쓴 조현명의 두 찬문

초상화의 오사모 위로는 두 꼭지의 활달한 행서체 시문이 배치되어 있다. 한 사람이 짓고 쓴 두 찬문(贊文)은 다음과 같다.

 

淵然而深 깊은 못처럼 심원하게
若有所思 사색하는 듯한 모습이 있는데
少日迷方之悔耶 젊은 날에 방황한 후회 때문인가?
欣然而樂 기분 좋게 기뻐하며
若有所得 깨우친 바가 있는 듯한데
老而讀書之效邪 늙어서 독서한 효과 때문인가?
燕坐池亭 못가 정자에 편안히 앉아있으니
春花滿園 봄꽃이 정원에 가득하다.
畵中故人 그림 속의 옛 친구와
相對無言 말없이 마주보고 있다.
無言之言 말없는 속에서 말을 나눔은
以心相宣 마음이 서로 통해서이다.
桑楡之功 노년의 공부는
請與子而周旋 그대와 더불어 함께하리라.

丁卯三月日, 獨坐漪漪亭. 晩圃公送示影本, 要贊語, 故戲書之如此云. 歸鹿山人.
정묘(丁卯: 1747) 3월 어느 날에 혼자 의의정(漪漪亭)에 앉아 있었다. 만포공이 자신의 초상화를 나에게 보내주면서 찬어(贊語)를 요구하므로 장난삼아 이처럼 쓴다. 귀록산인.(歸鹿山人)

 

怵然有斂退之色 조심스러운 듯 겸손한 기색이 있으니
屢閱乎風波者耶 여러 차례 세상의 풍파를 겪은 사람이 아니겠 는가?
俛焉有進修之意 열심히 노력하며 덕을 쌓고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으니
欲復之桑楡者耶 인생의 노년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行廉而愼 행동은 청렴하면서도 신중하고
才周而通 재주는 두루두루 통하였으니,
言德之弘也 언행과 덕행이 넓기 때문이다.
拔之衆棄之地 척박한 지역에서 발탁되어
躋之仰月之崇 모두가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何以報之 무엇으로써 보답을 할까?
宜爾讀書乎主命亭中 주명정에서 독서를 함이 알맞다.
鹿翁又贊 녹옹이 또 찬문을 짓다.

 

초상화를 그린 다음해 1747년 3월에 찬문을 짓고 쓴 ‘귀록산인’과 ‘녹옹’은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아호이다. 조현명은 영의정까지 오른 소론계열로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여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유명한 문신이다. 1747년 3월이면 조현명은 영돈녕부사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앉아 이 글을 쓴 장소, 곧 잔물결이 이는 못을 갖춘 ‘의의정(漪漪亭)’이라는 정자는 조현명의 정원에 있었던 모양이다.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문인으로 알려진, 같은 소론계열 구택규와 교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는 조현명이 쓴 앞의 찬문 내용이 적절히 말해준다. 앞 글은 4언시풍으로, 초상화 그림 못지않게 ‘깊은 연못처럼 깊게 사색하는 모습’의 구택규 인상이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은 조현명의 문집 󰡔귀록집󰡕에 실려 있다. 뒷글은 7언시를 앞세운 찬문으로 구택규의 조심스런 겸손과 풍파를 겪은 인생을 드러낸 글이다. 동시에 청렴과 덕행으로 고관에 오른 품위를 찬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구택규 초상화에 대한 또 다른 이의 찬문이 전한다. 소론계 문인으로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자 이광덕(李匡德, 1690〜1748)이 쓴 ‘구참판택규화상찬’이 그것이다. 구택규가 참판에 오른 1747년경에 40년의 세월 변화를 회상하며 구택규의 포용력과 날카로운 눈을 상찬한 글이다. 이 찬문의 구택규 초상화도 장경주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