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사진
04/03/2018
/ 박평종

저널리즘 사진에 대한 몇 가지 편견과 오해, 가치절상과 가치절하, 이런 문제들을 요즘 느낀 대로 정리해 본다. 이상하게도 요즘 사진가들은 저널리즘 사진을 폄하하는 것 같다. 저널리즘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진이 저널리즘으로 구분되는 것을 싫어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가 저널리즘보다 더 멋져 보이는 모양이다. 요즘 전시장의 벽에 걸리는 사진 중의 상당수는 저널리즘 사진에 가까운데도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이 또한 저널리즘 사진에 대한 가치절하에서 나오는 발상인 것 같다. 요컨대 다큐멘터리는 예술이며 저널리즘은 그냥 신문, 잡지사진이라는 이분법이 크게 한몫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의 차이는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수적 요소들을 고려할 때나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밖에는 없다. 서로 다른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는 둘 다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역사적 발생 과정이 다를 뿐이며, 유통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학문적 합의는 없고 개인들 간의 견해 차이만 있다. 내 생각에 중요한 차이는 역시 소통에 있다. 다큐멘터리는 대중들과의 소통에 그리 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사진가의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형식, 그러니까 자기 시각을 배타적으로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아방가르드였으며 시각적 혁신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다른 사진가들의 시각과 확연히 다른 개성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반면 저널리즘은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아방가르드의 문법, 이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쉽게 이해받기 어렵다. 하물며 대중들이 그런 사진의 문법을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 워커 에반스의 문법, 로버트 프랭크의 문법이 당대에는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저널리즘 사진이 그런 문법을 구사한다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없다. 그래서 문제는 사실 매우 간단하다. 저널리즘의 가치는 옹호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저널리즘 사진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부정을 한다. 내 사진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 대중들과 소통을 잘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소통을 못하고 있어’라고 외치는 셈이다. 우습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다.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소통하기 싫다고 외치는 꼴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매우 소통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이다.

아마도 저널리즘 사진을 하면서도 자신이 다큐멘터리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후자가 예술적이며 전자는 비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 유치한 이분법 때문인 것 같은데, 이 또한 우습다. 사실 시각적 혁신을 중요시 했던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은 서양의 경우 아방가르드 예술, 그러니까 모더니즘 예술의 한 축에 속할 뿐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매우 고립적인 예술의 한 경향일 뿐이었으며, 공리주의 예술의 원칙에는 위배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저널리즘 사진은 인쇄매체의 상대적 위축 때문에 점차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확산도 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장 사진가들이 민감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저널리즘 사진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다만 유통의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랬다. 유통 방식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위기로 느껴질 수 있다. 시간이 좀 필요하다. 어쨌든 저널리즘 사진의 중요한 가치를 사진가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 저널, 이것은 저널리즘 사진가들에게 아마 밥벌이 수단일 것이다. 그래서 정말 소중하다. 그런데 저널리즘 사진, 이것도 밥벌이 수단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때는 정말 밥벌레가 된다.

박평종 (운영위원, 중앙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