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진사진학연구센터

한국사진 역사의 시대 및 장르 기본 틀

William F. Mayers, 오경석초상,1872,
베이징 영국공사관

1. 한국사진 역사의 원점 : 1860~90년대

한국사진 시대의 개막은 1880년 무렵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카메라를 구입해 이 땅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찍어 사진을 통용시킨 것이다. 1860,70년대는 이의익(동지사은사)과 오경석(통역관 출신의 개화선각자), 그리고 김기수(수신사)와 김홍집(수신사) 등이 중국과 일본에서 찍은 초상화사진과 조선의 프랑스, 미국간에 강화도를 중심으로 충돌이 벌어진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기록된 사진들, 그리고 1881년 조사사찰단(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7명의 조사와 수행원의 초상사진은 외국인들에 의해 우리가 찍혀진 사진들이다. 사진문화의 물결은 점점 가깝게, 그리고 빨리 밀려오고 있었다.

사진시대의 시작은 1880~1884년 사이에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사진술을 익힌 사진선각자들이 촬영국(오늘날의 사진관)을 세우면서 비롯된다. 그들은 주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받아들였으며 일반에 사진을 널리 알리는 촉매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입 이후 국내외에서 촬영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조종필, 김윤식, 김홍집, 민영환, 윤웅열 등의 유명 인사들의 초상사진과 집합사진은 이 시대의 결정물이며 한국사진사 연구의 중요한 내용을 이룬다.

고종황제의 초상,1897,작자미상

2. 왕실의 초상 : 1880-1910년대

1884년 3월 16은 역사상 최초로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은 기념비적인 날이다. 국왕이 신문물로 사진을 수용한 사실은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고종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어진이나 국가의 기록화 등의 제작을 사진에 의존하게 만들었으며, 구중궁궐의 인물들과 생활 모습을 일반인들도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파장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 사진 문화가 뿌리를 내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은 이후에도 자주 사진을 찍었으며 사진을 가장 많이 남긴 국왕이 되었다. 1894년 한국에 온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고종 어진 촬영 후일담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언제나 예의바른 그 군주는 내가 왕가의 예복을 입은 그의 초상화를 가지기 원하는지 물어 보았다. 값진 삼홍색 비단과 왕의 어깨와 가슴에 걸쳐있는 수를 놓은 가슴받이는 그에게 매우 잘 어울렸고 그의 태도에는 위엄이 있었다. …(중략)… ·
사진을 찍은 후에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진기의 특이한 부품들을 살펴보았는데 왕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모델촬영후 기념사진-독립사진관-1930년대

3. 사진관 시대의 초상사진 : 1910-40년대

사진관은 사진 도입 무렵부터 공공성을 띠면서도 영업적인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촬영국 등으로 불렸으나 이후 사진관이라는 명칭이 우리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진관은 서양문물의 상징으로 여겨져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성난 군중에 의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고,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시련과 존립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1895년에 단행된 단발령으로 인해 자신의 전통적 모습을 남기려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사진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신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후 사진관은 1940년대까지 사진문화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남기려는 욕망을 해결해주는 초상사진의 촬영에서부터 결혼, 약혼, 환갑, 돌 등의 기념사진, 그리고 일상의 기록과 풍경사진의 모든 작업을 맡아서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사진관 시대의 초상사진은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사진관 시대를 열었으며 수준 높은 사진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당대의 유명한 서화가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의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의 사진, 1910-20년대의 사진관 사진, 한국인 사진가들의 공동체였던 경성사진사협회 회원들의 사진, 그리고 한국에 진출했던 일본인 사진사들의 사진이 연구의 대상이다.

문치장, 설빔차림의 아이들, 젤라틴실버프린트,1936

4. 예술사진 운동 : 1920-40년대

사진이 하나의 표현수단으로 또 문화의 일부로 정착된 1920년대 이후부터 45년 사이에 전개된 이른바 예술사진의 결정이 연구의 주 내용이며, 공모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박필호, 이해선, 이형록, 임석제, 임응식, 정도선, 최계복 등의 사진가들과 1929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개인전람회를 개최한 정해창 선생을 비롯한 공모전과 무관하게 작업해 온 사진가들 즉 강대석, 김광배, 민충식, 신락균 등의 작품들이 있다. 사진발달의 보편적 과정을 살펴볼 때, 초기 사진과 시대의 초상사진이 대중들에게 자연스런 문화가 되면서 사진의 기능과 범주는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특히 사진매체가 갖는 예술로서의 가능성들이 기존 매체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모색되면서 몇몇 선구적인 사진가들에 의해 예술사진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의 사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사진 운동은 처음에는 (1920년대) 한국인 사진관의 사진가들로 구성된 모임인 경성사진사협회 회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사진기술이 발달하고 편리해짐에 따라 점차(1930년대) 많은 사진가들의 참여가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예술사진은 어찌 보면 자칫 우리가 잊고 사는 전통적인 우리의 심미적 정서를 일깨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일영, 광화문, 젤라틴실버프린트, 1945

5. 격동기의 기록 : 1940-50년대

해방의 감격과 함께 불어 닥친 국내의 여러 정치적 이념대립의 소용돌이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격동기의 현장 기록에 관한 연구 분야이다. 사실상 우리에게 있어서 해방은 민족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슴 벅찬 해방의 기쁨은 사진가 정남영-당시 미 군정청의 농수산 분야의 미 육군대위로 근무-이 35㎜ 컬러 슬라이드 필름에 기록했던 당시의 서울거리와 시장의 상인들, 그리고 몇몇 지방의 모습들을 통하여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가 촬영한 필름들 속에는 평화로움이 가득 차 있으며, 당시의 생활상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특히 냉전체제가 빚어낸 여순 사건과 6.25 전쟁은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의 서막을 알리면서 우리를 또 한 번의 혼돈으로 빠져들게 했다. 나라 잃은 아픈 기억들이 해방의 기쁨으로 치유되기도 전에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여순 사건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사진가들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현실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이전의 관조적이고 유유자적하는 태도 대신 가능한 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임응식,병아리, 젤라틴실버프린트, 1952

6. 활발해진 국제사진전 진출 : 1940-60년대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진계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던 현상은 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사진공모전에 출품하는 일이었고, 여기에서 어떤 작품이 수상 하느냐에 따라 사진의 흐름이 주도되는 시기였다. 해방 이후의 공모전, 특히 국제사진공모전은 일제식민지 시대의 공모전과는 다른 시대의 의미를 지닌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공모전이 주로 통치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선무(宣撫)하는데 이용된 반면, 해방 이후에 계속된 사진가들의 국제공모전에서의 입상은 개인적인 영예를 넘어서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실추된 한국의 이미지를 드높인다는 의미에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1952년 임응식의 가 일본의 아르스국제사진살롱에 입선한 이래 성황을 이루며 1960년대 중반까지 해외에서 열린 공모전에 300명 이상의 사진가가 진출하였고, 입상한 작품 숫자도 4,000여점에 달했다. 국제보도연맹에서는 196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해외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입상한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했다. 한국사진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국내외 공모전의 상황과 사진의 작품 경향 등이 연구의 대상이다.

이형록, 거리의 구두상, 젤라틴실버프린트, 1955

7. 다양해진 표현의 세계 : 1940-70년대

이 분야는 해방 이후에 전개된 작가 중심의 사진적 흐름을 개괄해 볼 수 있는 연구의 분야로서, 본격적인 사진­예술 논쟁의 모습과 다양해진 표현의 세계를 당시 사진가들의 작업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변기와 뒤이은 6.25 전쟁의 혼돈 속에서도 사진가들의 작업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는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사진가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나 현실과 큰 관계가 없는 미적탐구와 사물을 관조하는 다소 상반된 입장을 갖게 하였다.

전자의 입장에 선 사진가들과 후자의 입장을 고수한 사진가들의 작품은 각각 리얼리즘사진과 살롱이즘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서로 다른 사진의 본질론을 주장하였다. 1950년대 시대적 상황 속에서 획득한 리얼리즘에 대한 사진가들의 현실 자각은 사진의 사회적 기능을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고, 살롱사진가들 또한 일제시대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예술사진의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한편 리얼리즘 사진과 살롱 사진 유행의 흐름 속에서도 주관적인 경향의 사진과 사물의 본질론에 접근하려는 독자적 세계를 추구한 사진가들이 나타났으며, 다양한 형식실험들이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사진 표현의 폭을 확장시켜 나갔다.

주명덕, 부산연산동, 월간중앙 1972년 2월호

8. 잡지사진의 시대 : 1970-1980년대

60년대 말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개발독재의 흐름은 산업화의 명분 속에 70년대 10월 유신으로 이어지고, 70년대 한국정부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모습으로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시작된 대중과 권력의 이념적 대립은 무분별한 산업화 정책과 개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났다. 사진가들은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소외된 사회 구성원들의 아픔과 불만은 다양한 방법으로 포착했다.

50,60년대 리얼리즘 사진의 유산을 받고 성장한 시사 월간잡지의 사진가들은 소외된 계층의 삶에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그들의 사진은 정부의 관용아래 제도권 내의 잡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특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가시화하여 독자들로부터 끝없는 관심을 유도하였으며 급격히 밀려오는 산업사회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자생터를 잃어가는 서민들의 나락에 빠진 자괴감을 사진에 나타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계속된 개발독재 시대에 우리사회가 앉고 있던 아픔을 사진가들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사진이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장이다.

강용석, 동두천기념사진 C Type 프린트, 1988

9. 한국현대사진의 제 양상 : 1980년대 이후

19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해서 발표된 사진가들의 작업 중 현대사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현재의 사진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들과 작품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 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새롭게 등장해서 과거 사진의 전통과는 별개로 자유로운 형식실험을 통해 사진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거나, 정통적인 사진의 틀을 따르면서도 사진의 내용이나 시각에 있어 과거의 사진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본 경우이다.

이 시기 한국사진의 양적, 질적 성장은 국내의 관심과 주목을 끌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빈번히 이루어지는 한국 작가들의 활발한 해외 전시가 입증하듯이 국제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는 데까지 나갔다. 물론 국내외에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소수의 사진가들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미국, 유럽 등에서 한국사진에 보내는 관심의 열기는 단순한 수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